야망의 세월(Shall We Tell The President?)

92년쯤인가? 어느 날 누이는 서점에 가던 아버지와 나에게 <야망의 세월>이란 소설책을 한 권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제법 유행이던 텔레비젼 드라마의 원작 소설을 말했던 것이 분명했을텐데 아버지와 내가 사들고 간 책은 제프리 아처의 <야망의 세월>이었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아버지의 심리가 제법 이해가 되기도 한다. 막내딸의 부탁인지라 거절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서점에서 한참 유행하던 텔레비젼 소설을 사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고 결국 서점주인은 이리저리 갈팡질팡하던 우리 부자에게 그 당시 통속 소설계를 주름잡던 아처의 책을 팔아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통속소설 한 권만 사서 서점을 빠져나오시기 황망하셨던 아버지는 내게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을 안겨주셨다. 십 년 하고도 몇 해가 더 흐른 이야기를 지금와서 꺼내는 이유는 예상 외로 내가 이 책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루에도 몇 번씩 깨닫기 때문이다. 학교까지 가기위해서 나는 매일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야 하는데 그 보도를 건널 때마다 까닭 없이 책의 문구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가령은 오늘은 이랬다.
헨리 오스본이 코가 석자나 빠진 주정뱅이로만 알았더니.

다음에 떠오르는 내용는 이렇다.
아벨은 뉴욕 54번가를 전세내고 있는 듯한 플로렌티나의 점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운 점포의 개점은 대성공이었고 뉴욕 사람들이 모두 몰려드는 듯 했다. 아벨은 이제는 소녀가 아니라 여인이 되어버린 딸을 바라봤다. 녹색의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어느 노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전부인인 이자벨의 모습도 보였다. 아 저기 귀족풍의 청년이 내 사위되는 리차드 케인이로군. 아벨은 그의 오랜 친구인 조지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목덜미에 스며드는 차가운 바람에 목도리를 여미며 자신이 늙었다고 느꼈다.

사실 내가 이 책을 매우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약간의 도움만으로도 소설 전체를 복구할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매우 오랜 세월동안 이 책이 우리집 책장에 있던 두 권의 통속 소설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다른 하나는 마농 레스꼬였다- 좋은 책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좋은 책을 맛을 알려면 어쩔 수 없이 그다지 정신에 유익하지 않은 책에도 손을 대야 한다. 하지만 통속 소설의 피해란 초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오랜 잠복기를 거쳤다가 예전처럼 무엇인가를 외우는 일이 힘들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할 즈음에 나타나 이렇게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구차하게 만드는 것이다.-어제 공부한 것도 흐릿한 사람이 십여 년전에 읽은 소설의 문구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표절>에 등장하는 니콜라처럼 나 역시 이 책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행동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는지 두려울 때가 많다. 이 통속 소설은 폴란드계 호텔업자의 딸 플로렌티나가 결국 미국의 여자 대통령이 된다는 이야기로써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직을 승계하기까지의 세월을 그린 소설이다. 솔직한 평가를 말하자면 영국에서 하원의원까지 하다가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할만한 위인의 싸구려 소설인데 이 책에 등장하는 플로렌티나의 남편인 리차드 케인에서 어떤 역할 모델을 발견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불현듯 드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보수적인 말투를 흉내내고 있지는 않은지, 가령 오늘 뉴스에서 본 KT&G와 아이칸의 위임장 경쟁을 보면서 리차드 케인이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은행의 경영권을 되찾기 위해 벌인 일들을 오버랩시킨다던지 하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다. 사실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내가 내 전공에 흥미를 보이고 이 길을 택한 데에는 읽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기 싫은 이 책이 영향이 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결국 결론은 이런 것이다.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집안에 통속 소설을 놓치는 않으리라. 만약 놓게 된다면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을 놓아 한 권을 반복해서 읽는 일이 없도록 하리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의 부탁이라도 절대 통속 소설을 사주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서점주인에게 책을 찾아달라는 행동은 더구나 그가 권해주는 소설을 그냥 집어오는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해 보는 것이다.

P.S.
사실 이책은 Kane and Abel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두 가문의 연대기인데 역제는 <카인과 아벨>이라는 책이다. 이외에도 이 시리즈에 속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우후죽순처럼 번역되어 나왔는데 재미 하나만큼은 보장할 수 있는 책이다. 다만 절판된 까닭으로 도서관에서도 구하기 힘들다. NL에서나 볼 수 있는 책.

[#M_ P.S. 2nd | less.. | 마음은 가볍게, 생각은 신중하게,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파편화 되었을 뿐이라는 수도사의 말을 믿자. 파마는 내 편이 아닐지 몰라도 포르투나는 내 편이 확실하다고 그렇게 믿고 또 믿어보자. _M#]

2 thoughts on “야망의 세월(Shall We Tell The President?)

  1. 지나가다 들렀습니다.
    이 책은 카인과 아벨 연대기 3부작 중에 3부에 해당하는 작품이죠.
    1부가 카인과 아벨, 2부의 원제는 The Prodigal Daughter로 아벨의 딸, 아내의 사랑, 사랑을 일으킨 여자 등 다수의 제목으로 번역됐습니다. 이 책인 3부는 암살 D-데이, 여대통령 플로렌티나 등의 제목으로 나오기도 했고요.
    1-3부 4권짜리로 나온 합본도 있어요.

  2. 3부가 아니라 2부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Shall we tell the president? 는 3부에 해당하는 제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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