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추(Il pendolo di Faucault)

조금 황망한 분류이긴 하지만 난 ‘푸코의 진자’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라 ‘푸코의 추’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곤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황망할 것도 없다. 내가 읽은 것은 검정색 표지를 달고 있는 ‘푸코의 추’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 ‘푸코의 추’를 읽었을 때 그 책은 조금 식기는 했지만 여전히 따뜻한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뭐라고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90년대 ‘푸코의 추’ 속에는 생생한 현재성이 살아 있었다.

‘주전자 뚜껑이 열리네’ 라는 문구에서 박장대소 했으며 아불라피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이었다. 또 색인 카드를 가지고 문화계의 샘 스페이드가 되겠다고 법석을 떠는 주인공 까소봉 역시 이해가 되었다. 전쟁 말기의 어린 시절에 관해 늘어 놓는 벨보 만담들은 마냥 즐거웠으며 디오탈레비의 머뭇거리면서도 칠 사고는 다 치는 그 모습은 귀여웠다. 그래 아직 그때의 내 머리 속에는 이탈리아 월드컵때 보았던 이미지가 생생했다. 그 사람들이라면 이러고도 남을 사람들이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직 적군파는 농담의 영역에 포섭되지 않았으며 이제 막 베테통이 한국 시장에 상륙하던 시절이었다.

완전수에 대한 그 은큼한 이야기와 카불라, 생제르망 백작 역시 그랬다. 20세기 말엽에는 무언가 오컬트적인 요소와 기호학적 장난이, 위트있는 농담 따먹기가 즐거운 시대였다. Templar는 아직 게임용어가 아니었고, Jacque de Molay는 이제 막 태어난 ‘www시대’에 꽤나 인기있는 주제였다. 모짜르트가 프리메이슨이었으며 유럽의 위인들 중 일부는 장미십자회와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단신이 신문에 실리던 시대였다. 조금 지난 뒤에는 월요일 저녁에는 X- file을 했고, 타롯 카드가 호사가들의 취미로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오래지 않아 팩트 소설의 시대가 열렸다.

며칠 전 지친 표정으로 까페테리아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맞은편 테이블에는 앳되어 보이는 아가씨 둘이 앉아 있었는데 각자 <푸코의 진자>를 한 권씩 들고 이렇게 재미없는 책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불끈하고 화가 났다. 한여름 밤을 때우기 위해 이 손 저 손을 배회하던 6000원 짜리 <푸코의 추>와 자칭 해설가로 바빴던 내 과거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때에는 이렇게 비싸고 두꺼운 소설이 흔하지 않았다는 것도 밝혀둔다)

하지만 21살 남짓되어 보이는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고작 다섯살 차이가 밖에 나지 않지만 그네들과 난 서로 다른 시대를 보아왔고 다른 시대에 세상에 관해 눈을 뜬 것이다. 그들은 결코 <좀머씨 이야기>에 열광했던 시대를 겪어보지 못했으며 <콘트라베이스>와 <비둘기>가 자치했던 위상을 모른다. 하루키 스타일의 스타일리스트들이 대학가를 점령하기 전도 모른다.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모르리라. 에릭 시걸과 존 그리샴. 그리고 스티븐 킹이 왜 잘 팔리는 작가라 불리는지도 모를 것이다. 5.25인치 디스크를 먹던 컴퓨터를 보지 못했으며, 왜 비포선라이즈에 사람들이 열광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상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네들의 말이 옳다. 우리는 <푸코의 추> 속에서 공통 분모가 될만한 기호학적 코드를 발견했지만 코드는 시대에 따라 변모하며 재해석을 거치는 것이 되려 당연하다. <푸코의 추>이던 <푸코의 진자>이던 두번째 밀레니엄을 넘은지도 몇 년이 지난 이 즈음에는 그 어떤 현재성도 남아 있지 않다. 심지어 낡았고 어떤 특이점도 없으며 교훈과 유머도 없다. 그들에게는 에코風의 소설들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던 모습 대신 팩트 소설이란 이름으로 시장에 흘러 넘치는 혼란스런 현재가 전부일 것이다. 대신 그들은 늙고 고루해져 버린 우리가 지니지 못한 그들만의 새로운 재미가 있을 것이며 내가 평생 이해하지 못할 어떤 글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을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누군가가 <푸코의 진자>에 관해 묻는다면 그냥 <푸코의 추>를 읽었다고 대답할 요량이다. 그리고 왜 읽어야만 하는지를 흥분한 어조로 쏟아내지도 않을 생각이다.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가 다르듯 <푸코의 추>는 우리 세대-엄격하게는 나보다 조금 나이든 세대의 것이 맞다. 난 우연찮게 교섭구역에 서 있던 셈이다-의 아이콘이다. 다른 세대에게 우리의 아이콘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래야만 하는 것이 제일 세련된 태도다. 혹 다음에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푸코의 추>는 ‘Post hoc ergo propter hoc’이라고 말하리라.

19 thoughts on “푸코의 추(Il pendolo di Faucault)

  1. 베이직으로 프로그램을 짜본 세대와 다빈치 코드사이의 간극이랄까. 얼마 차이 안나는것 같긴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아득하기만 합니다. 하긴 저도 6000원짜리 개역판으로 접하긴 했습니다만 또 요즘은 양장판이니.. 😉

  2. 그 차이가 제법 큰듯 싶습니다. 이래저래해도 결론은 가능하면 책은 나왔을 때 빨리 읽자. 시간 지나면 재미가 반감된다. 먼저 읽었다고 철지난 소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말자 정도가 되더군요. 조금은 씁쓸했습니다.

  3. 감탄사를 리플로 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하나 남겨야겠습니다. 정말 잘 봤습니다. GQ1월호에 「< 난쏘공>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라는 기사가 있었는데 한정수씨의 글이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마음에 들어서 스크랩해두었었는데 여기 더 멋진글이 있네요:)

  4. 답글이 매우 늦었네요.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하던 노트북의 사망 사고로 근래 조용한 삶을 살았거든요. 조금 갑갑하긴 하지만 공부와 독서 시간은 매우 늘어나더군요.

    투정 반 응석 반으로 쓴 글이었는데 감탄사까지 남겨주시니 뿌듯한걸요. 예전에 한참 까페가 유행하던 시기에 < 장미다방>에 이런 글을 남겼으면 돌 맞았을 것이 분명하다고 실핏거리며 공개 버튼을 누른 글이거든요.

  5. 잠시 망설이다가 글 남깁니다.
    저 주소가 바뀌었어요. 끝에 ‘t100’이 들어가요.
    홈페이지 다루는데 재주가 없어서 주소가 자꾸 바뀝니다.

    기억하세요?
    지난번에 제가 쓰는 글이 매력적이라고 하셨죠.
    신변잡기적 일상사의 나열에 불과한 제 글에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겸손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평소 동경을 품고 있던 분께 칭찬을 받으니
    괜스레 우쭐해지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찬익씨가 쓰는 리뷰는
    저로서는 어려운 부분들이 많아서
    이해가 잘 안될 때도 있어요.
    이해하려면 몇 해 기다려야 하는 글들도 있고요.
    그래도 곰곰이 읽어보고 있습니다.

    시험이 다음주라고 알고 있는데
    준비는 잘 되어가세요?
    신사의 허리를 강력하게 붙들고 있는
    메인 그림의 우산 속 여인이 혹시
    그 뗄레야 뗄수 없다는 시험 증후군이 아닌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큽

  6. 감사합니다. 더 많은 말들이 마음 속에서 춤을 추고 있지만 일단 급한 불 먼저 꺼야겠지요? 우산 속의 여인이 엉뚱한 곳을 붙드는 바람에 더욱 바쁜 한 주를 보내고 있답니다.

  7. 그 책들 내 시대책인데 그때 같이 읽었냐? 너 어리지 않았나 그때
    기억이 가물가물 아무튼 열광했었지…..
    이 누난 어떤넘 회고록 자료준비땜에 뻥튀기 먹으면서 쓰고 있다.
    이담에 왠만하면 양심에 찔리는 회고록같은건 쓰지 않는 양심을 지켜가자

  8. 양심있는 사람은 회고록 따위는 못쓴다고 했어. 우리 정도의 설렁한 양심이면 백서 정도가 딱이지 않을까?

    한글만 깨우치고 나면 그 다음부터 독서 인생에 나이란 중요하지 않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그 무렵에 바닐라 아이스크림보다 책을 좋아하지 않으면 간서치로서의 삶을 절대 못살게 된다고.

    그런데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한거야? 난 어제처럼 전부 또렷한데. 누나들이 치사하게 < 양들의 침묵>을 나만 빼놓고 읽지만 않았어도 < 열국지>가지고 참견만 안했어도 내가 그렇게 서점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거라고.

    1. 대신 불성실한 십대를 보내게 되었다고. C.P. 나 역시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 몰라.

  9. 여기 계셨군요. 저도 푸코의 ‘추’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답니다. 나중에는 누렇게 뜨고 곰팡이 냄새까지 풍기던 그 책을 말이죠. 아, 저도 감탄사 없이는 그 책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10. 푸코의 추 세대 대공감이요 ㅋㅋㅋ
    너무 마음에 닿는 글이라 퍼갔어요.
    원치 않으신다면 덧글 남겨주시면 삭제하겠습니다 ^^

  11. 여기까지가 오컬트가 신비감을 유지한 마지막 영역이 아닐까? 이후로 비의와 신비주의는 그저 하나의 소도구로 쓰였고 그 색채가 그나마 유지되었던 것도 에바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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