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몇 주전 친구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하 안내서>를 샀다는 내 말에 다 읽고 소개해준 사람에게 횡포를 부리지 말라는 요지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부연으로 내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의 소설이 아니라는 것도 덧붙였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소개해준 사람이 없는 까닭으로 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친구 녀석에게 대신 횡포를 부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안내서>를 읽은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즐기면 된다는 사실이다. 그 무엇도 기억하지 말자. 그냥 정신 없이 산만한 문체에 빨려 들어가 넋을 잃으면 된다. <안내서>를 읽으며 무언가 심각한 고민을 하는 사람은 나와 비슷한 수준의 멍텅구리임이 분명하다. 문장을 음미하고 복선을 찾고 플롯을 재구성하는 일에 에너지 낭비하지 말자.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합리적인 개연성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남은 일은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농담의 향연에 합류하는 것뿐이다. 말 그대로 Don’t panic이다.

사실 꽤나 대단한 두께를 자랑하는 이 묶음을 모두 읽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대단히 재미 있고 유쾌한 소설이다. 최고라는 의미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는 ‘최고의 SF소설’로 불릴만하다. 하지만 진지한 열정과 문학적 품격을 바란다면 서문도 읽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한 생각은 오백 년 후의 세대들이 이 책을 20세기 후반의 인류가 읽던 표준 문학 작품으로 알고 공부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떨까 하는 난잡한 상상이었다. 농담의 향연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무언가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하는 교수와 20세기 후반의 사회적 배경을 토대로 텍스트를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의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들을 상상하고 있으려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혹 지금 우리가 고전으로 인정하는 어떤 글들도 수백 년 전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내게 비쳐진 <안내서>처럼 유머와 아이러니의 집합체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렇다면 <안내서>는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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