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학적 시스템에 나타나던 군입대 휴학대신에 재학이란 꼬리표가 나를 반긴다. 하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감회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난데 없이 나타나 가슴을 한대 툭 치고 사라질 것 같은 친구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벽을 타고 울리는 희미한 내 이름에 깜짝 놀라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노라면 곰살맞은 사내 녀석들이 나타나는 것이 요즘의 일상이다.

아니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목소리를 구분하는 인지 능력이 부조화를 이루기 시작한 것 같다.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점점 많아진다. 첫마디만으로도 모든 비상 사태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큰소리치던 나는 사라지고 뜨악한 표정으로 스스로의 눈치 없음을 탓하는 나만 남아 있다. 로맹 가리의 말대로 중요한 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면 내가 잊어버린 것들 모두가 중요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하는 의문이 머리 속에서 쿵쿵거린다.

하지만 내 삶이 특별히 불행한 것은 아니다. 명확한 연유를 찾을 수는 없지만 나 역시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친절해지곤 한다. 봄다운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행인들에게 까닭 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고 화사한 젊음을 자랑하는 꽃다운 아가씨들에게 시선이 간다. 봄을 맞이하여 스킨과 에멀젼을 바꿨고 열람실의 추레한 괴물들과 스스로를 구분하기 위해 연한 향수도 샀다.-사실 이것을 얼마나 쓸지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나 역시 열람실의 괴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지난 열흘 동안 착실한 걸음으로 전시회 순례도 끝마쳤다. 어느 갤러리에서는 우아함과 우울함을 동시에 갖춘 도슨트를 보고 그곳을 매달 방문하기로 친구와 합의했으며 어제는 야수파를 신나게 즐겼다. 한철 읽을 책들과 교재들을 구입했고 노트북도 조만간 수리될 참이다.

가끔은 강의실에서 버릇없이 발을 떠는 덜 여물은 사내 녀석들을 때려주고 싶기도 하지만 아직 실행에 옮긴 정도는 아니고 수년 동안 친구들의 봄을 악몽으로 만들었던 매혹적인 유혹도 보이지 않는다. 하루에 기백 페이지를 넘기고 또 다시 기백 페이지의 책을 읽는다. 아침 햇살에 상쾌하게 눈을 뜨고 아직은 싸늘한 저녁 바람을 친구 삼아 진한 커피를 마신다. 태도를 가다듬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면도를 하고 하루의 실수를 되돌려 보며 베게 속에 머리를 묻는다. 꿈 속에서는 매화를 그린 서화들이 춤을 추고 목련은 언제 피냐고 잠꼬대를 한다.

스물 여섯의 봄은 이렇다. 이제 시작이기에 어떻게 변모할지 모르는 봄이지만 아직은 쌀쌀함을 더 많이 품은 봄이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다.

P.S.
시립미술관에 갔다가 정말 좋은 사진 구도를 하나 발견했다. 결코 예쁘게 찍어주고 싶지 않은 사내 녀석들을 담기에는 너무 아까운 구도라 5월에 열릴 피카소전에는 피사체되는 것에 너그러운 사람과 함께 가야겠다.

2 thoughts on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1. 이 곳의 글을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빙긋 웃게되요. 🙂
    남의 시선을 따라 하루를 보낸 그런 느낌이 들거든요.

    p.s 너그러운 사람을 피사체 삼아 멋진 사진을 찍어오시길~

  2. 사실 이글은 작년 이맘때 친구 녀석이 쓴 복학생 일기를 반쯤 모사한 것이예요. 당시에는 막 복학한 친구 녀석에게 배가 아파서 나도 꼭 한번 써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었는데 학교를 다시 다니기 시작하니 정말 쓸 말들이 많아지더군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학교에 혼자 버려두고 졸업을 해버린 친구 녀석들에게 그래도 여전히 잘살고 있어 하고 말하는 의미도 있는 것 같아요.

    빙긋 웃으셨다니 매우 다행인걸요. 사진에 관해서라면 구도를 밝히라는 협박 속에서 앞으로 두 달을 어찌 견뎌야 할지 모르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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