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독서론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론이 주변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말대로 소설 따위는 읽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어린 벗을 보면서 문학이야말로 논픽션보다 더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법이라고 설명하는 내 자신이 귀찮아졌다. 위대한 생각과 영혼을 낳는 것은 항상 허구라는 상상력에서 태어난 진실이다. 사실이 낳을 수 있는 것은 사실에 불과하다. 사실은 진리를 낳지 못한다. 하지만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1미터의 책과 5만엔 돈’이라는 인용구를 듣는 순간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지식의 방대함 앞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와 넓게 열린 접근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 자체가 생명력 없는 객체에 불과했던 때는 단 한순간도 없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독서론은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독서론이 있는 만큼 경계해야 할 독서론도 있는 법이다. 어린 벗에게 무교양의 지름길을 안내하는 다카시의 독서론이 바로 그렇다.

4 thoughts on “어떤 독서론”

  1. 다치바나 다카시가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아버지와 문학과 논픽션 사이에서 자주 부딪힙니다. 전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고, 아버지는 지식책을 추구하시거든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소설이란 허무맹랑한 허구’라고 하시는데, 전 거기에 반대하며 ‘오히려 소설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라고 말하곤 하죠. 그래서인지 제 방에는 소설 책이 넘쳐나고, 아버지께서 쓰시는 책꽂이에는 지식관련 책만 수두룩합니다. 물론 지식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소설에서만큼 현실에 지식을 잘 반영한 책이 있을까요? 꼭 이런 부분뿐만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도 문학은 충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공감을 느껴 댓글 남기고 갑니다.

  2.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애서가로 불리는 누군가의 독서론을 비난했습니다만 사실 저 역시 소설보다는 전문서적이 더 많습니다. ‘허무맹랑한 허구’에 불과한 소설들이-그럼에도 이런 소설들도 존재해야 제대로 된 소설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가장 현실적’인 소설들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세상에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소설들을 포기한다면 소리 없는 무채색의 삶이 되지 않을까요? 이야기가 없는 세상에는 말이 필요없을 것이고 우리는 단 하나의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만 살게 되지 않을까요?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1984년> 같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살만 루시디는 < 하룬과 이야기 바다>에서 이야기의 중요성에 대해 발화와 자유로운 상상력이란 그림을 그려 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한편으로 씩씩거리기도 했지만 김탁환의 < 열녀문의 비밀>에서 청장관 이덕무가 주인공에게 아직도 세책방에서 방각 소설들을 사다 읽느냐고 물어보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설령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소설을 읽는 그 마음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것은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링크를 걸어 놓지는 않으셨지만 실례가 되는 방법으로 블로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참동안 정신 없이 읽다가 답글을 남기는 참인데 자주 방문해도 될까요?

  3. 실례되는 방법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방문을 막을 이유야 없죠. 그런데 한참 동안 정신없이 읽으셨다니… 제 블로그에 글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닌데, 제 블로그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맞다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4. 작년 한 해동안 국내에서 발간된 신간만도 4만 5521종류에 달하지만 실제 한국인의 독서량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성인의 24%는 일 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으며, 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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