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sh

1.
내일은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충무로 대한극장 2층 스타벅스에 창밖을 바라보며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을 한가롭게 삼십 분쯤 바라만 봤으면 좋겠다. 영화는 뭐라도 좋다. 일부러 1시간 반쯤 여유 있게 표를 끊어 그동안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Browning의 책을 읽고 싶다. 혼자 영화를 본 다음에는 천변을 이십 분쯤 산책했으면 좋겠다. 지하철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른 잠에 취했으면 좋겠다. 따사로운 햇살이 담긴 추억에서 비롯된 꿈을 내 머리에 불어 넣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한참을 자다가 새벽 2시쯤 핸드폰 진동 소리에 깨어나 십 분쯤 통화를 했으면 좋겠다. 소박하다면 소박하고, 어렵다고 어려운 하루다. 어째서 난 이런 하루를 원하는 것일가?

2.
언제부터인가 진실이라고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해석하는 머리는 바쁘지만 마음은 한 톨의 동요도 없다. 동요 없는 마음은 잔물결조차 일어날 수 없는 얼어붙은 호수다. 자세히 바라보면 잔물결의 흔적이 얼음 속에 남아 있지만 딱 거기까지다. 햇살처럼 빛나던 봄을 즐기는 권리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닌 모양이다. 봄 기운에 떠밀려 마음에 없는 공수표를 남발하지만 기실 나에게 늘상 호기 있게 말하는 그런 의욕은 없다. 바쁘고 합리적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어서 외면하는 것이란 진실을 말하고 나면 누군가 봄을 영원히 훔쳐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3.
전화 번호를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덤으로 핸드폰도 바꿔야 겠다. 기실 한 달 요금이 3만 원을 넘기기도 힘든 핸드폰을 바꿔서 무얼 하겠냐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의 여름이 찾아 왔다. 여름에는 여름에 어울리는 무엇인가 필요하다. 친절하거나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진저리가 나고 급할 때 유용한 사람이 되는 정황도 사절이다. ‘It is your business’라고 이마에 먹을 새기고 싶다. 봄이 규정 지었던 나란 인간의 이미지도, 그런 내가 했던 사랑도, 그 사랑이 남긴 그 어떤 것도 전부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제는 그저 내 삶 하나만 행복했으면 좋겠다. 덧없는 후회 한방울과는 그 무엇도 교환하지 않는 인생의 여름이기를 진정으로 소망한다.

E.
고흐의 해바라기로 장식된 수첩에 쓰여진 기록들을 모아 보니 혼란스런 일상의 단편이 들어난다. 어느 것 하나 거짓은 없지만 문장으로 풀어진 삶은 모순의 연속이다. 하지만 모순에 속아서는 안된다. 가장 극적인 상황 속에서라면야 감정이 인생을 지배하는 순간들이 빈번히 등장할지도 모르겠지만 일상에서 감정이 하루를 지배하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P.S.
비는 내렸으나 하루 종일 학교에 있다. 덧붙여 쓰기 싫은 레포트를 아직도 쓰고 있다.

6 thoughts on “I wish”

  1. 내일 있는 중국어 시험 땜에 단어 외우느라 힘들어요.. 그래도 전화번호 바꾸면 알려줘요.. 우리는 언제쯤 상처에서 벗어날까요 ?

  2. 네. 그럴께요. 당장 내일이라도 바꿀 기분이었는데 막상 바꿀려니 단계가 너무 복잡해요.

    상처라기 보다는 투정에 가까운 것 같아요. 언어와 약속의 노예가 되는 것 같아 걱정스럽지만 돋움볕이 들기 시작한 여름을 성큼성큼 걷고 있으니 너무 걱정말아요.

  3. 그냥 해보는 말인지 진작 알고 있어요. ^.^ 조금만 simple 해졌으면 좋겠어요. 후후후.. 나도 잘 못하는 일이지만요. 진짜 여름이 다가오네요.. 다음 주에는 이곳에 눈이 온다고 하네요. 3월에 눈이 꼭 한번씩 오고 마네요.

  4. 4월에 오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죠.^^ 어제 친구랑 자주 들려 쉬곤 했던 슬럼화된 벤치에 앉아 있으려니 꽃눈이 터질려고 모양새를 잡고 있더군요. 보름쯤 있으면 겨울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먼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5. 와, 잘못 들어온줄 알았어요. 봄나물 같은 스킨인걸요. 오늘 버스를 타고 압구정 근처를 지나는데 목련이 이제 곧 피려고 한껏 숨을 고르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꿀꿀한 기분일랑 완연한 봄내음에 모두 털어버리시길 바랍니다^-^

    1. 봄나물 같던 스킨은 wp에 서 있는 작은 집과 같은 것이라 바꿨어요. 아침에 나와보니 꽃망울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더군요. 우울한 기분같은 것은 풍요로운 저녁 한 끼와 함께 사라진지 오래랍니다.

      목련이 숨고르기를 끝내는 날 저녁에는 너른 잔디밭에서 친구들과 契會를 열어 술이나 한 잔 해야겠습니다. 복학생들에게도 봄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지기 하나가 계속 투정을 부리던데 이참에 입을 틀어 막아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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