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이 책을 얻게 된 경위는 비겁함 그 자체였다. ‘살라미스 해전’의 출판사 이벤트 와중에 내 블로그에 올린 리뷰를 출판사에 관한 비판만 삭제하고 보낸 결과 획득한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름의 변명은 있다. 이벤트에 상품으로 걸린 이 책을 꽤 오랫동안 갖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구매의 우선 순위가 밀리기는 했지만 절판의 위험이 약한 책이었기에 다소 방만한 자세로 관망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다소간의 비겁함을 감수할 만큼의 재미가 있었다. 아니 재미 이상의 것이 있었다. 집에 내려가는 기차 속에서 펼쳐 든 책은 여행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아니 챕터를 넘길 때마다 척추를 타고 올라와 모골을 송연 하게 만드는 숭고함의 파고를 느낄 수 있었다. 고양된 정신이라는 말이 끊임 업이 머리를 맴돌았다.

사실 이 책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다룬 책 가운데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 오스만 제국을 주제로 삼은 현대의 저작들 가운데 이 책의 도움을 받지 않은 책은 없다. 게다가 대부분의 문장에서 지켜지는 중립성과 때때로 중립성을 포기했을 때 전달되는 가슴 벅참이 절묘하게 뒤섞인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더욱이 같은 시대를 묘사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가 어리석은 몽상가들을 조소하고 있으며 픽션의 분위기까지 풍긴다면 런치만은 포위당한 도시 속에서 보여준 비잔틴인들의 용기에 관해 말하고 있다.

왕복 50여 킬로미터의 여정 속에서 나는 지갑 속에 들어 있는 명함을 꺼내 페이지마다 끼워 넣었다. 좋은 문장들을 베껴 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리뷰를 쓰면서 가장 내키지 않는 일은 책의 직접 인용구를 다는 일이다. 문장은 하나의 생명체이지만 책과 떨어져 생존할 수 없다. 또 좋은 문장이 쓸모 없는 내 문장 사이에서 고통 받는 상황 역시 싫다. 문장이 책과 떨어져 숨쉴 곳은 마음 밖에 없다. 결국 한참 동안 베껴 두었던 인용문들은 휴지통으로 사라졌다.

로마인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비잔틴인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최후의 비잔틴인들인 콘스탄티노플의 거주민들은 모욕을 감내하기 보다는 투쟁을 선택했고 패배의 결과로 일부는 학살되었고 일부는 노예로 팔려갔다. 도시는 콘스탄티노플이란 이름 대신에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바라보는 유럽과 아시아의 교두보에 여전히 존재한다.

역사가들은 비잔티움 혹은 콘스탄티노플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이전의 수백 년 동안 보여주었던 비겁함을 일소하기에 충분한 그들의 마지막 용기에 관해 이야기 한다. 도시는 새로 태어났고 옛 도시인들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이 아쉬워할 것 같지는 않다. 술탄의 도시에 받쳐진 어떤 헌사보다도 더 인상적인 헌사를 사라진 옛 도시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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