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집 기와에 내려 앉은 햇살이 유리 가루처럼 휘날리는 토요일 오후다. 석류와 블루베리로 로스팅된 차는 깔끔하면서도 달고 바람결에서는 빨래 마르는 냄새가 난다. 책장을 넘기던 손은 지겨움을 참지 못하고 흘러 나오는 하품을 숨기기에 바쁘고 눈동자는 나른함을 감추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흉내를 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 흉내 좀 내보려고 면도 좀 했어’라는 문장을 빈 노트에 적고 있다. 지난 한 주 동안 유난히 ‘사람 흉내’라는 단어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썼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보고 싶은 사람들 대신 반갑지 않은 사람만 보게 되는 운명의 농간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본다. 교정을 걷다가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를 듣노라면 과거로 되돌아간 듯 가슴이 설렌다. 뒤돌아서 상대를 확인할 때까지 걸리는 5초의 시간가운데 잠시나마 설레임을 느끼는 2초간의 시간이 실망한 마음을 추스르는 3초보다 더 좋기에 여전히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다음 주에는 미친 듯이 공부에 열중하는 며칠을 보낸 뒤 가벼운 기분으로 홀로 <맥베스>를 보러 갈 예정이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홀로 떠돌다가 어느 낯선 거리에서 셰익스피어의 폴리오를 선물할 누군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고 아니라 해도 좋다. 이제는 두 짐짝을 서로에게 맡긴 채 이어피스를 꼽고 마음 푸근한 산책과 순례를 다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샤워를 하다 뚝뚝 떨어지는 코피로 시작되던 봄이 올해를 고비로 완전히 종언을 고한 것처럼 이제는 멜로 드라마의 조연으로 시작되던 봄 역시 안녕을 고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