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rmur

1.
아침부터 학교에 사복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뛰기 좋은 운동화와 바지, 꽉 졸라 맨 허리띠, 스포츠 신문 사이에 숨긴 커다란 무전기와 짧은 스포츠 머리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저런 차림일 바에는 차라리 정복으로 출입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대학생답게 본능적으로 사복 경찰이 학교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껄끄러웠다. 무엇인가 특별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이유야 어찌되었건 교내를 배회하는 경찰은 용인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그들이 교내에 있었던 특별한 사정은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점심을 끝마쳤을 무렵에서야 알 수 있었다. 싱가포르 대사관 소속의 벤츠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학교를 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 사복 경찰들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돌아다닌 이유가 설명이 되었다. 근래의 이곳이 떨치고 있는 악명으로 보아서는 충분한 보안 조치라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입맛은 쓰다.

2.
일주일 가운데 목요일 아침에 이곳에 앉아 신문을 읽는 시간이 제일 좋다. 나무 그늘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고 일견 정연한 듯 보이지만 불규칙적인 돌들이 소리 없이 나를 반겨준다. 오른손에 돌을 한 움큼 집어 들고는 말 없이 책장을 넘기며 차가운 돌들이 가져다 주는 감촉을 즐긴다. 오래지 않아 먼지를 벗고 투명한 빛을 뽐내는 하얀 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법열에 준하는 기이한 희열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이 곳이 좋은 이유는 나무 잎새로 파고드는 햇살의 싱그러움 때문도 한적함 때문만도 아니다. 이 곳이 정말 좋은 이유는 과거의 어떤 사건에도 물들어 있지 않은 낯선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앉아 있노라면 어디든지 걸어갈 수 있을 듯한 착각에 휩싸인다. 이곳에서는 어떤 그림자도 배회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현재에 실존하는 자아뿐이고 너무나도 맑아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드는 화창한 아침뿐이다.

3.
근래의 나는 서투른 사람이 된 듯 하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겠노라 무심해진 사이 마음은 메말라 갔고 이제는 상황에 적절한 표현을 잊어버렸다. 어설픈 농담과 진심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걱정이 값싼 연민처럼 보이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난 친절이 넘치는 사람도 아니고, 호의를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위선적인 관심을 보이는 짓 따위는 죽어도 하지 못하는 성마른 사람이란 사실이다. 여전히 내게 있어 관심은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항상 그렇듯이 언어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오해에 가려 좀처럼 보이지 않는 진실은 더 맑고 더 크다.

4.
언제부터인가 과하게 기쁨을 들어내는 일이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듯 하다. 좋은 일이 있었음에도 되려 침묵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침을 떼고서는 가야 할 길을 마저 걷고 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끝까지 가보기로 오래 전에 결심한 참이다. 가끔은 혼자 걷는 길이 위태로우며 외롭기도 하다. 하지만 운명이려니 하고 체념해 버리면 참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다. 

4 thoughts on “murmur”

  1. 기쁨을 드러내는 것도 연습하면, 그런 사람이 될 것 같은데요…

    1. 기쁨을 들어내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 같거든요. 그래서 더욱 가라앉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매우 세속적인 것이지만 꼭 갖고 싶은 것이거든요. 이것은

      참. 사진 속의 모습 좋아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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