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eak time

다모클레스의 검처럼 머리 위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시험이 끝났다. 결과는 나중 문제이고 일단은 지난 몇달 동안 지속되었던 긴장의 끈을 잠시 늦추어도 된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헤픈 웃음이 입가에 걸린다. 부족한 잠과 오랜 시험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내려와 보니 비가 나를 반긴다. 앞마당에 자리를 펴고 밤새 별자리를 보겠노라는 다짐은 장마에 묻혔지만 빗소리가 싫지는 않다. 사람 구경조차 쉽지 않은 이곳의 빗소리는 도시의 빗소리와는 다른 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본다.

정신을 차리고 달력을 보니 어느 사이에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 버렸다. 만 스물 넷 십개월, 군필에 대학 3년을 마친 것이 지금까지 내가 해놓은 것의 전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남자의 과거가 이렇게 요약된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프다. 나도 어느 소설가처럼 폼나게 나를 묘사해 보고 싶지만 난 테니스화를 신지도 않고 햇살에 비친 옆얼굴이 줄리앙처럼 아름답지도 않다. 아니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조차 진실을 가리기 위한 연막일지 모른다. 어쩌면 나란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은 몰개성적인 취미로 이루어진 고루한 존재라는 꼬리표가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던 서재에 앉아 홍차를 마시며 고루한 사람답게 갚아야 할 편지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 몇 주동안 해야 할 일들과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을 가늠하고 있자니 모든 일이 귀찮아진다. 지루한 삶에 대하여 뭐라고 편지에 쓰고, 사람들을 만나 어떤 뻔한 거짓말을 해야 할지 아득하기만 하다. 어느 사이에 취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고루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조차 없는 치명적인 상황은 아니다. 사실 그 어느 때보다 낯선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마음을 사로 잡는다. 예전 같았으면 눈길이 닿지도 않았을 소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이제야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 낯선 곳을 여행할 시간에 접어 든 모양이다.

I wish… 
‘Salon de Thé’ 구경. 그런데 호텔 14층에 있는 찻집에 가는 것은 넌센스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복학생 친구들의 이번 학기 숙원이던 VIPS行. 사실 위장 크기를 재어보기 위한 목적도 없지 않다/ 피카소전과 인상파전 관람. 이직 기간동안 마찰적 실업 상태에 있는 친구말에 의하자면 둘 다 별로란다/  돌아오는 수요일에는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제대로 취해 보기. 사실 지금까지 못취했던 것은 시험 때문이 아니라 취할 만큼 마실 재원 부족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밥집 순례. 보름쯤 식비 걱정을 덜 수 있을 듯 싶다. 이제야 레포트 대필에 대한 대가를 지급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결혼식장에서 소리소문 없이 유부남이 되어버린 형님들 놀리기/ 더 늙기 전에 클럽行. 마지막으로 가본 것이 4년 전 신촌이었으니 말 다했다/ 연극 보기. 그런데 올 여름에는 볼 만한 것이 없더라 / 수유동에 있는 인장사에 성명인과 전각 주문/ 절판을 염려하여 사들였으나 시간 제약으로 읽지 못한 책들 정리 / TMAX 5롤 찍기/ 우연이라고는 너무 자주 마주치는 2층 어문학실의 某氏 집중 분석/ 이사 및 조금 긴 여행 준비/ 일단은 이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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