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長霖)

1.
시간은 내 마음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요즘의 난 줄기차게 흐르는 시간 앞에 무책임하게 모든 것을 방임하고 있다. 어서 정신을 차리고 준비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음에도 비가 온다는 핑계로 일찍 자리에 누웠다. 시급히 결정해야 하는 문제들 앞에서 이렇게 무력한 내 자신을 발견하기란 꽤 오랜만의 일인듯 싶다.

2.
보름쯤 아무 생각 없이 본가에 내려가 쉬고 싶다. 일주일쯤은 연락두절 상태로 잠을 자고 싶다. 뜻을 알아주는 지기들을 만나 불안감을 토로하고  싶다. 내 대신 모든 것을 고민하고 결정해줄 대리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한다. 제법 멀리 걸어왔음에도 여전히 이 길은 안개 속에 놓여 있다. 언제쯤에야 이 길의 끝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길에 끝에서 웃을 수 있기만을 바라는데 어느 것 하나 녹녹지 않다.

3.
서툰 사람이 되어버린 나를 발견하는 일은 항상 마음을 썰멍하게 만든다. 매력에 굴복하기 찰나,내가 느낀 매력을 표현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나를 발견하고 부풀어 오른 마음이 시들어 버렸다. 시든 마음을 붙잡고 들어와 4시가 되기도 전에 잠을 청했다. 사랑한다는 말, 좋아한다는 말, 아름답다는 말을 하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진 걸까? 눈동자를 바라보며 표정으로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이상 붉은 얼굴의  낯설기만 한 사내로 비춰지는 것은 아닐까?

4.
전시회에 가는 동안 uncertain world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친우와 토의를 거듭했다. 결국 의연하게 또 다시 걸어가보는 것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낯선 결론도, 모르는 결론도 아니다. 하지만 밤새 내리는 굵은 빗방울을 맞으며 새벽 산책을 하는 일이 싫은 것처럼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길을 걷는 것은 마음 내키는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조금 쉬운 길과 어려운 만큼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길이 놓여 있다. 쉬운 길을 따라가는 쪽이 제일 현명한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쉬운 길을 따라가다 후회하기 보다는 어려운 길을 따라가며 힘들어 하는 쪽이 주어진 재능과 자부심에 조금 더 적합한 길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함 없는 사실이 있다면 오늘처럼 짓굳게 내리는 빗 속에서는 결코 걷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다. 새벽부터 깨어 음악을 듣고 밀린 독서를 하건만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옮기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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