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1.
귀가하는 기차 안에서 어린 시절 알고 지내던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고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꽤나 신경질이 난 표정이었다. 예의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주의를 주려는 찰나 그 아이를 알아 보았다. 그 아이 역시 나를 알아봤고 우리는 멋쩍은 표정으로 눈인사를 나누었다. 어째서 무슨 음로를 꾸미는 사람들처럼 눈인사를 주고 받았을까? ‘잘 지내’라던지, ‘아이들이 예쁘네’ 같은 사교적 멘트는 어째서 생각나지 않은 것일까?

두 아이를 낳은 그 아이의 몸에서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던 그 옛날 소녀의 실루엣이 환영처럼 겹쳐 보였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작은 도심에서 첫아이를 안고 가던 그 아이와 마주쳤던 기억이 났다. 그 아이의 나이든 남편과 닮은 둘째 녀석을 유심히 바라봤다. 모든 상황에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곧잘 르느와르의 ‘목욕하는 소녀들에’에 등장하는 등을 뒤로 돌린 소녀같다고 되뇌이곤 했다. 그녀의 길며 곧은 등허리가 내가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정립하는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가? 그러던 그 아이가가 이제는 르느와르에서 드가의 모델로 변해 있었다.

두 아이를 혼내는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에서 오빠로 이내 손님으로 호칭이 바뀐다. 어느 소설의 한 장면 같았다. 호칭이 정해지지 않은 사내만큼 서글픈 것이 있을까? 그 아이에게 내 머리 속에는 그 아이의 소녀 시절과 막 첫 아이를 낳은 시기의 환하게 빛나는 얼굴이 남아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결례라는 사실을 모르지만 않았어도,  나에게 조금 더 분별이 없었다면 혹여 그 아이가 옛날처럼 환하게 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2.
집에 내려왔다. 지갑 속에는 한 푼의 현금도 들어있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사실 현금이 필요 없다. 현금이 있어봤자 쓸 곳도 없고, 그 흔한 비디오 대여점 하나 찾을 수 없는 이곳에서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동네 청년이 되기 위해 2킬로미터쯤을 걸어나가야 한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내가 경험해 본 가장 오지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이곳에도 장점은 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온전하게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넓은 책방에는 읽어야 할 책들이 쌓여 있고 오래 자지 않아도 새벽이면 잠에서 깨어난다. 기차의 기적 소리를 제외하고는 바깥 세상을 떠오르게 만들 어떤 자극도 없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사람 많은 도심을 걸어 다니며 아름다운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로 친구들과 쉴 틈이 없었는데 이제는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도, 아름다운 존재들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적한 나의 휴가는 일주일 후면 끝나게 된다. 다시 사람 많은 대도시에서 하루를 보내고 제법 긴 여행을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 여행 동안 내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반드시 결정해야 하는 문제들이 적힌 수첩과 함께 하는 여행이지만 여행의 묘미는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일 테니 말이다. 아니 아무런 인연의 끝도 닿아있지 않는 낯선 세계에서 이방인으로 보내는 몇 달이야말로 내가 그렇게 갈구하던 휴식이 아닐까?

돌이켜 보면 내 하루는 겉보기에는 느긋하지만 항상 쉴 틈 없는 나날들로 점철된 몇 해였던 듯싶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시간이란 괴물에 쫓겨 많은 것들을 외면하곤 했는데 이제는 어떤 것들을 외면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 속 어딘가에 묻혀 있는 그 긴 목록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안녕’ 이란 말로 무엇이든 회복할 수 있다 자주 말하곤 했었는데 그것으로 관계를 회복할 수는 있어도 잃어버린 기억을 해결하기란 요원하다는 사실을 연거푸 깨닫는 요즘이다.

3.
창문을 열어 놓으면 소리 없는 불청객이 찾아오곤 한다. 이 불청객은 오래지 않아 동거인으로 변했고, 언제부터인가 이유없이 그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거나, 그를 괴롭히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난 그에 대한 내 감정은 복잡하다. 혐오하는 듯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녀석을 좋아하는 내 자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복잡한 감정의  수렁에 빠져있을 때 난 녀석을 집 밖으로 추방해 버린다. 소리 없이 다시 찾아오는 그가 어제의 그와 같은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M_불청객의 인상착의|less..|

_M#]

2 thoughts on “휴가”

  1. 우리 나이가 그렇게 되어버렸나.
    벌써 애가 있는 친구들이 생기고 말야.
    개구리 이쁘다. 이쁘다는 말을 여기에 쓸줄이야…ㅜㅜ

    1. 응. 한참 전에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생각해. 친구라기보다는 아는 정도에 가깝겠지만 나의 기억 속에 반 페이지쯤 남아 있는 아이의 변신은 여전히 이해불가능의 영역이야.

      예쁘다는 표현은 개구리에게도, 지렁이에게도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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