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눈을 뜨자마자 무덤가의 귀신을 벗삼아 은하수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궁벽한 일상에서 탈출하기로 마음 먹었다. 택시를 불러 타고 고개 두 개를 넘고 하천 하나를 건너 도착한 역사의 보도 블록에 감격할 찰나 곁을 지나가는 젊은 처자의 살내음이 느껴졌다. 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노승이 산사를 벗어나는 수행승에게 던진 첫마디처럼 그것은 매우 ‘강렬한 유혹’ 이었다. 짐짓 점잖은 척하며 시계를 들여다 보았지만 기차가 올 때까지 13분이 더 남았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시계로 눈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헤르만 헤세의 『두 사람의 죄인』이란 단편이 떠올랐다.

이른 새벽 그들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에 함께 일어났다. 그들은 짐을 챙겨 짊어졌다. 나막신이 바위에 부딪쳐 딸그락 소리를 냈다. 길을 걸어가면서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으나 상상의 나래는 이미 거리의 환락을 쫓고 있었다. 유스티누스는 거리의 아름답고 육감적인 여자들만을 훔쳐 보았으며 바지리우스는 달콤한 술과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고 대리석 책상 위를 소리 내어 구르는 주사위의 음향에 귀를 세웠다.
이심 전심으로 그들은 격렬한 양심과의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두 사람의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으며 메마른 입술은 기도를 중얼거렸으나 그들의 욕망은 끈끈하게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때 그들을 지켜보았다면 아마 틀림없이 순결한 순례자로 보기는커녕 절망에 빠진 사나이들이라 여겼을 것이다.


물론 두 단락이 통째로 기억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익숙한 도시로 오는 한 시간의 기차 여행 중에서 난 스스로가 유스티누스와 바지리우스의 분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너무 강렬한 유혹이 많았다. 공부를 핑계로 산사에서 한 달을 보낸 친구가 학교에 나타났을 때의 눈빛이 떠올랐다. 거울이 없어 확신할 수 없겠지만 ‘제대로 달아올랐다’고 놀려대던 그 눈빛과 지금의 내 눈빛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신은 이런 의미에서는 공평하다. 놀리는 자에게 놀림 받는 자의 상황을 예외 없이 거치도록 농간을 부리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후의 하루는 아래의 인용구처럼 펼쳐졌다. 

그는 젊은 여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어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그녀가 바삐 그 자리를 떠나자 퍼뜩 눈을 들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살 찐 맵시, 검은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삼단같이 늘어뜨려진 머릿단과 다갈색 목덜미, 매끈한 양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낭창거리는 모양새 좋은 허리, 구두를 신은 허여멀쑥한 다리 등이었다.
그 광경은 가련한 은자의 이마에 비지땀이 맺히게 했다. 머쓱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어떤 세찬 부끄러움과 답답함, 일종의 전율마저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며 이마를 소매 끝으로 문지르고 나서 마침 그녀가 되돌아 오는 모습이 눈에 띄자 얼른 눈을 식탁 위에 내리깔았다. 그녀는 아랑곳없이 음식을 내려 놓고 한동안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는 곧바로 사내의 마음 속에 일고 있는 곤혹과 착란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매우 오랫동안 난 이 단편 소설이 내 이해의 밖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데미안』의 두 번째 장인 「두 개의 세계」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이 소설 역시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내 자신의 이야기였다. 누가 뭐라 해도 난 점잖은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치며 자라났고 내 친구들 가운데 소위 ‘들이대는’ 성향을 지닌 이는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다. 비굴하지 않은 당당함을 자부심이라 믿는 것과 유혹에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몇 달 동안 자르지 못할 머리를 입대하는 젊은이처럼 짧게 잘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후퇴하기 시작한 이마의 선이 짧게 자른 머리칼 사이로 명확하게 들어났다. 고민의 주제가 될 만큼 심각한 편은 아니지만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은 슬프다. 하지만 그보다 더 슬픈 것은 버릇처럼 무릎에 올려 놓은 두 손에 스치는 감각과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머리를 만지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아낙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까닭 모를 관능이다. 보통의 사내들이 즐기는 술자리 토크에서는 백일 휴가를 나왔을 경우에만 관능으로 인정되는 가장 수준 낮은 이 단계에 당황스러워 하는 내가 우스워지기 시작했다.

9월에 보스턴으로 떠나는 친구와 오랜 만에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다시 만날 날이 언제인지 기약할 수 없는 서로의 인생 항로가 아쉬웠지만 어디에 투묘를 하던 최선을 다할 녀석이기에 걱정은 없었다. 다만 함께 보낸 십대의 후반부가 떠올랐다. 내장산의 등산로를 천천히 걸으며 나누었던 대화와 학교 후원에 누워 오갔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의 우리가 꿈꾸었던 삶에 우리는 얼마나 충실한 것일까? 80%는 충실했다 자부해도 될 듯싶다. 하지만 충실하지 못한 20% 때문에 우리의 발걸음은 마냥 가볍지 못한 것이고 고민에 휩싸여 가끔씩은 신을 원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 업무 및 환전을 끝낸 나는 비를 맞으며 역사로 향했다. 하지만 길고 긴 ‘나막신이 바위에 부딪쳐 딸그락 소리’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플랫폼에서 함께 비를 맞던 처자는 삼류 통속 소설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했다. 가령 ‘알몸으로 햇볕에 태운 것이 틀림 없는’ 같은 묘사라든지, ‘커다란 링 귀걸이를 한’ 혹은  ‘가슴골 사이로 빗물이 흘러 내리는’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묘사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묘사의 대상이 된 마이애미의 백사장과 비 내리는 8시 10분 전의 시골 플랫폼 사이의 간격에 웃음이 나왔다.

이야기의 마무리는 이렇다. 점잖은 모범생 이미지와 다르게 오늘 난 마음으로는 수십 번 욕망에 굴복했고 눈으로는 그보다 더 많이 욕망에 굴복했다. 다시 일상의 고요함으로 돌아온 지금 『두 사람의 죄인』을 펼쳐본다. 욕망에 굴복하는 일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헛된 외출의 끝은 늘 이런 것이 아닐까?

19 thoughts on “외출”

  1. 야야 언제올라오냐? 누난 수요일 아침에 내려갈까 한다
    또 모르지 맘동해서 화요일 저녁일지도 ㅎㅎ

    1. 내일 저녁에 내려온다며? 올 때 새로 산 카메라 챙겨오도록 해. 구경이나 해보고 나가자고. 수요일 아침에 출발할 예정이니까 시간 맞추어 와야 몇달 동안 얼굴 못보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을꺼야.

  2. 환전이라니 출국날짜가 가까워졌나보네요? 정말 부럽습니다.. 사실 너무 부러워서 이야기를 듣고 며칠밤을 뒤척였어요. 나도 나가버릴까- 이러면서요(웃음)

    1. 네. 목요일 아침 비행기예요. 싱가포르를 거쳐 런던까지 가야하는 꽤나 험난한 여정이 될 것 같아요.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 반이나 되지만 그럼에도 며칠 전부터 계속 혼자 신나하고 있는 것 같아요.

  3. 저보다 하루 늦게 가시네요. 런던 ! 너무 좋겠네요. 잘 다녀오세요

    1. 한국 시간으로 4일 10시 20분에 도착했어요. 8월 3일 출국했으니 거의 37시간쯤 걸린 셈이네요. 이곳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는지라 다들 저를 그냥 아시아계로 알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덕분에 평소에 듣기 힘든 이야기들을 많이 훔쳐 듣고 있어요.

      어제 밤에는 혼자 tate modern에 가서 칸딘스키 전시회를 보다가 체력이 바닥을 들어내 버렸어요. 겨우 아홉 방을 도는데 세 시간쯤 걸리더라구요. 무엇보다 아무리 도록을 봐도 이해할 수 없었던 칸딘스키의 작품이 실제로 보니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어서 기뻤어요. 꽤 복잡하고 관능적인 사람이더라구요.

  4. 누난 포도밭서 일하느라 정신없다
    포도밭 그여자가 나야 ㅎㅎ
    야 영국도착했냐?

    1. 응. 잘 도착했어. 이제 세인트 폴 성당을 보고 밀레니엄 브리지를 거쳐 어제 다 못본 테이트 모던을 더 보고 글로브 극장에 들렸다가 서더크 성당을 가려고. 오후에는 코치타고 앞으로 몇달 동안 살 그곳으로 이동하려는 참이야.

      어제 밤에 뱅크 사이드에 앉아 엽서쓰고 있는데 템즈강에 떠올라 있는 세인트 폴이 정말 멋지더라. 혼자라는 사실이 정말 아쉬웠어. 나중에 출장오게 되면 ‘미래의 내자’ 분과 함께 그곳에 앉아 와인 한 잔 마시면서 느긋하게 보내보고 싶더군. 다만 코감기가 걸린 상태여야 한다는 선행 조건이 필요하긴 하지만.

  5. 어디 익군 사는게 요즘 정신없지? ㅋㅋㅋ 상상 팍팍간다네
    기는 안죽는가? 하하 홈스테이는 어때? 궁금한게 넘 많다

    1. 여기는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어. 뭐랄까? 한국인의 합리성으로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할까?

      우리 동네에서 쓰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빌어 먹을 자유주의’야. 너무 광범위한 범위에서 민영화가 이루어져 복잡하기 짝이 없고 무책임해. 코즈의 논의에 따르자면 내부화의 필요성이 있는 부분이 분명있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것들이 너무 무시되는 경향이 있어.

      강력한 행정과 통합 아래 너무 오랜 삶을 살아오다 보니 적응이 안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책으로 읽고 상상한 위대함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야. 친구들 말대로 이곳은 위대함의 폐허만 남은 지루하고 노쇠한 나라임이 분명해.

      오랫동안 난 우리나라가 그다지 역동적인 나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곳에 와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어. 역동성을 상실한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타블로이드 신문에 매달리고 복잡한 문제에 관해 생각하려 하지 않아. 여기에서 가장 큰 서점에 들렸다가 그 빈약함에 얼마나 질렸는지…

      아무튼 누이 말대로 사는 것이 정신 없는 것은 사실이야. 질서 있는 느긋한 평화를 구현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어찌 되었건 내일은 런던에 갈 생각이야. 이 실망감을 지우려면 멋진 그림이 필요해!

      참. 이곳은 테러 음모로 정신이 없어. 내가 보기에 겉은 요란하지만 결국은 정치적인 문제야. 적당한 시기에 터트렸다고 생각하면 될 듯 싶어. 신문을 읽다보니 너무 짜임새 있게 이야기가 진행되더라고. 그런 의미에서 신문이 정직하기도 하지만 누나 말대로 선진국으로 정직을 최선의 신조로 삼아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 이들은 사소한 데에서 정직하고 큰 문제에 부정직한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6. 안그래도 테러가 비상이라고 난리야. 정직의 대상과 범위가 문제일거야. 뭐랄까 소시민적 정직인거지 아주 잘 봤당. 그래서 그냥 생각없이 편안하게 산다면 살만하지. 지리하고 답답할거다. 그래서 작은일에 호들갑도 크고 소소하지 일상들이. 그런데 네가 있는곳은 그나마 그 나라에서 먹고살만한 역동적인 축에 낄걸 아마…. 좀더 위로 공업도시로 가봐 아~ 비틀즈가 활동헀던 리버풀만해도 그곳에 가면 그냥 서럽기까지 할걸.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그 황량감… 영국을 잘 표현한 영화중 하나가 난 빌리엘리어트(?)라고 생각해. 나도 하도 오래되서 예상만 하는거구 너가 지내니 더 잘알겠지 뭐, 아무튼 그래도 조심해 대중이 많은곳은 조금씩 피하는 센스….. 그런데 좀더 살다보면 적응이 되면서 한적하다는 것에 길들여질걸…ㅎㅎㅎ 그런데 다들 너가니까 보고싶다구 그런다. 포도밭은 잘되고 있다.

    1. 요즘 천천히 이곳 신문들을 읽고 있는데 문제의 단초는 아프카니스탄 출신의 비행기 납치범들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야. 거기에 중동 사태에 손을 놓고 있는 블레어에 대한 비난 여론이 팽배해지면서 적절한 시기에 터트린 것이지. 만약 진짜 테러의 위험이 심각했다면 모든 항공기의 이동을 금지하는 미국처럼 강력한 방법을 썼겠지.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까 핸드 러기지 제한 조치가 일부 풀렸는데 정말 재미난 쇼였어. 무엇보다 내부의 적을 향해 시선을 돌려보려는 노력이 가상한데 왜 요즘 1984년을 쓴 조지 오웰이 이곳 출신이라는 사실이 섬뜩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어.

      아무튼 토요일에는 브리티쉬 뮤지엄에 다녀왔는데 흥미롭기는 했지만 감동적인 수준은 아니었어. 뭐랄까?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아마추어 수집가의 수준이 국가적으로 확대된 것이라고 보면 적당할 듯 싶어. 나 역시 전문가는 아니지만 최소한 읽은 것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감식이 가능한데 진짜 보물 대신에 보물을 닮은 이미테이션만 놓여 있더라. 물론 아직 절반 밖에 보지 못했고 아직 평가하기에는 이르지만 감히 문명을 운운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해. 이곳에 있는 것들은 우연과 약탈욕이 만들어 낸 우울한 초상에 불과하니까 말이야. 동아시아관에서 발견한 수많은 잘못된 설명이 고대 그리스 로마관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면 믿겠어? 다른 감상을 덧붙이자면 유물들을 보며 잘난 척 좀 한껏 하고 싶었는데 주변에 말할 사람이 없더라. 나중에 이곳에서 근무할 기회가 생기면 아이들에게는 매우 자상한 부친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잠시 든 정도가 전부야.

      참 브리티쉬 뮤지엄에서 코벤트 가든을 거쳐 레스터 광장까지, 심지어 트라팔가르에서 웨스터민스터까지 걸어 다녔는데 좀 실망스럽더라. 세계를 지배했다는 GB치고는 상상력이 결어 되어 있다고 해야할까? 내가 이렇게 쓰면 마치 맹렬한 쇼비니스트처럼 보이겠지만 누나는 내 삶을 아니까 가감없이 적어도 되겠지? 아무튼 이곳에서 보낸 며칠 동안 유일하게 나를 감동시킨 것은 늦은 저녁 뱅크사이드에서 본 세인트 폴 성당의 모습이 전부야.

      문화적으로 아직까지는 나를 압도할 만한 것이 없어 이곳에는. 금요일에는 맥베스나 볼까 하는데 연극은 아마 조금 낫겠지? 9월에는 아마 매주 뮤지컬을 보지 않을까 싶어. 문제가 되는 것은 미스 사이공을 더 이상 공연하지 않느다는 사실 정도인데 내가 좋아하던 레아 살롱가는 이미 뉴욕으로 떠났으니 뭐든 상관 없겠지?

      이미 우리가 너무 서구화되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신기한 것도 아예 모르는 것도 없다는 것이 옳은 말이 아닐까 싶어. 아무튼 난 잘살고 있어. 요즘 에코의 신간을 읽고 있는데 아마 이것이 에코의 마지막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가 쓰고 싶던 것들을 마무리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삶을 정리한다는 기분이 소설 속에서 자꾸 전염되는 듯 해. 그럼

  7. 오늘은 광복절
    밖은 너무 덥고, 언니랑 둘이 에어컨 밑에서 놀고 있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많이 보고 잘 놀길 바란다.
    영국이 아직 너에게 위대함을 느끼게 해주진 못한 거 같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 템즈강이라두 말야..
    부럽당..

    1. 그 광복절에 누구는 맛있는 모양을 가졌지만 설탕 덩어리에 불과한 맛없는 과자를 먹고 입맛을 버렸고 팔과 가슴에 잡히기 시작한 근육 덕에 팔을 못들어 올리는 미증유의 사태를 접하고는 깜짝 놀랐지 뭐야.

      아마 위대함을 절대 발견하지 못할꺼야. 그런데 가디언은 정말 마음에 들었어. 몇년 만에 신문 읽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어,

  8. 전화없을 때는 그나마 어머니께 카드사 문자 보여드리면 안심하신다.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보낸 엽서는 잘 받았다. 엽서 받았으니 답장을 보내야하는데 여기서 국제우편 보내려면 우체국에 가야잖아. 시골집은 포도 따느라 바쁘다. 아래밭이 박스당 평균 2만원 이상은 받고있어. 아버지 어머니는 통장에 숫자 올라가는 재미에 더워도 힘이 나신다. 나는 더 까맣게 그을러서 완전 시골처자다. 복남이는 더 예쁨 받고 있고, 백구는 사고를 많이 처서 내일쯤엔 된장 발릴 듯 하다. 시끄럽게 울고, 전선 끊고, 장판 찢고, 밥그릇 차버리고, 이젠 짖지도 안거든. 백구 대신 복남이가 밤새 집 지킨다. 여기야 언제나처럼 포도하고 강아지들 이야기 밖에 전할께 없다. 그리고 너가 주문해놓고 간 책들은 내가 잘 보고 있다. 요즘은 시간나면 엄마랑 인터넷 쇼핑에 빠져들고 있다. 아~ 이곳에 은하수는 이제 정수리까지 올라왔지롱~ ㅋㅋ 암튼 시골집은 이상무! 어머니께서 보고싶고, 건강하라고 전해달라셔. 그런데 너 송일국되서 귀국하는거냐? 누나가 못알아보게 살 많이 빼서 와라. 아빠는 잘 챙겨먹으라지만…ㅋㅋ 참, 혹시 미술관 갈때 필요한 정보 있으면 말해 브리핑해줄께.

    1. 학교 다닐 때에도 바쁠 때에는 며칠씩 전화 못드린 적도 많은데 그러시네. 알다시피 난 바퀴벌레 같은 적응력을 지니고 있어서 걱정같은 것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드려.

      별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배운 구습가운데 하나가 ‘얼마면 돼’이고 수중에 그럴 말할 정도로 항상 지니고 다니니 걱정말라고. 게다가 이곳에서도 평균키를 훌쩍 뛰어넘는 장신에 거구라 절대 안전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해.

      참. 로터리같은 것은 하지 않아야 되는데 싱가포르에서 드레스 셔츠를 한 벌 장만했다가 경품에 걸려 버렸어. 여권용 가죽 케이스인데 누나 카드로 질렀으니 경품은 누나한테 넘길께. 누나 제임스 로드가 쓴 자코메티의 작업실에서 자코메티가 몇년 째 작업하고 있다던 캐서린의 초상 기억나? 테이트 모던에서 봤는데 처음에 여자인지도 몰랐어. 캐서린의 초상과 로드의 초상이 아무런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니. 자코메티의 괴팍함을 알겠지? 참 누나가 그렇게 좋아하던 드가의 무용하는 소녀 역시 봤어. 뭐랄까? 순간 피그말리온 이펙트가 작용했는지 묘하게 사랑스럽더라.

      어찌되었던 은하수가 정수리까지 걸렸다고 매우 부러운걸. 요즘 나는 11시를 넘기지 못하고 자는 터라 이곳의 밤하늘을 본 적이 없어. 구름낀 하늘을 바라보았자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하늘이 예쁘던 때는 2주전에 끝났거든.

      어제는 텔레비젼 광고를 보는데 처음에는 술광고 인줄 알고 무조건 저 제품은 한번 마셔보아야 겠다고 다짐했는데 알고보니 스코틀랜드 광고였어. 그리고 신문을 보니까 한참 에딘버러 페스티벌이 진행중이더라고. 주말에 1박 2일이나 무박 2일로 다녀올까해. 지금 기차편과 비행기편을 다 알아보고 있는데 크게 차이가 없어서 고민중이야. 그럼 이번 주말에는 에딘버러에 있거나 런던에 있을 것 같아. 아직 덜본 브리티쉬 뮤지엄을 끝내야 하고 겸사 겸사 뮤지컬이나 한편 볼까해. 아마도 내가 미쳐 도착하기도 전에 카드사의 알람이 먼저 고지해주겠지만 말이야.

  9. ‘위대함의 폐허만 남은 지루하고 노쇠한 나라’
    이번에 영국에 가셨군요. 코멘트 내용 중에 윗 문장이 와 닿아 이렇게 글 남겨봅니다. 영국인들을 보다보면 여전히 자부심 있고 위엄(?)있게 사는 듯 했는데, 하이얌 님 말씀이 사실이라면 과거의 영광에 묻혀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가 영국에 출장을 자주 다녀오시는 편인데, ‘소수의 엘리트가 이끄는 나라’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엘리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일처리 하나 제대로 못하는 바보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영국 전역을 돈 것도 아니고, 모든 영국인을 만나고 온 것도 아니기에 무턱대고 수긍할 수는 없겠지만, 워낙 강력히 말씀하시기에… 영국에 갔다오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똑똑한 편이라는 게 실감나더라는 말씀까지 하시니; 전 홈 스위트 홈을 외치는 사람이기에 외국에 나갈 일이 웬만해선 없겠지만, 하이얌 님의 코멘트를 보니 더 갈 생각이 없어지네요. 정경 좋다는 스웨덴(제가 예쁜 자연을 좀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같은 데 가면 모를까. 아버지께서 그저께 영국 출장에서 돌아오신 터라 영국에 대한 얘기가 많이 오고갔는데, 마침 하이얌 님께서 거기 가계시다고 하니 갑자기 말이 많아졌네요. 부디 마지막까지 좋은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폐허 속에서도 가끔 건질만 한 게 있다고 하니…

    1. 위엄이라기 보다는 서푼짜리 자존심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 싶어요. 거리를 걷다보면 이른바 좋았던 시기의 향수가 여기저기에서 보이는데 그 향수 속에 젖어서 무기력하게 일상을 보내는 것 같아요. 이곳의 이슈는 얼마전 승자가 결정된 빅브라더스의 결론과 누가 누구와 잤느냐는 타블로이드 신문들이 읊어대는 선정적인 스캔들이 대부분이예요.

      아버님 말씀대로 이곳은 소수의 엘리트가 모든 것을 이끄는 엘리트 중심주의 정치가 일반화 된곳이예요. 도서관과 서점을 구경하다보면 지금은 그 소수의 엘리트마저 자취를 감추어가는 듯 하지만요. 어쩔 수 없는 호기심으로 전공 서적들을 몇시간동안 뒤적인 적이 있는데 전부 미국 교재들을 수입해서 쓰더군요. 뭐랄까? 이곳에서 뭔가 대단한 것들을 발견할 줄 알았는데 한국에서 제가 보낸 일상이 더 풍요롭고 멋졌다는사실을 발견하게 되네요.

      사실 이곳의 경우 최저 임금이 한국보다 높게 형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문직의 경우 임금 격차가 격심하게 벌어지는 거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물가 수준을 고려해서 구매력을 평가해보면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많아요. 나중에 조금 더 데이터를 취합해서 제대로 된 글로 남길 생각인데 지금은 여건이 안좋네요.

      아무튼 만약 이곳 여행을 계획하신다면 늦으면 늦을 수록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한국의 경제력과 물가 수준이 조금더 양등하거나, 이곳의 부동산 버블이 꺼지고 내각불신임 정도의 강력한 정치적 이슈가 생겨야 그나마 좀 살기 좋은 나라가 될 듯 싶거든요.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