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피오의 꿈

짐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이곳에 챙겨온 유일한 책은 이안 피어스의 ‘스키피오의 꿈’ 한 권 뿐이다. 사실 이마저도 챙겨오지 않으려 했으나 지루한 비행을 생각해서 한 권 챙겨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지인들의 조언에 따라 챙긴 책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토록 긴 비행동안 난 단 한 줄도 문장을 읽을 수 없었다. 난기류에 휘말려 롤러코스터를 타는 스릴을 느끼다 보니 문장을 읽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안 피어스의 ‘스키피오의 꿈’은 ‘핑거포스트’를 통해 그의 팬이 되었던 독자층을 반분 할 것 같다. 일부는 ‘스키피오의 꿈’에 실망을 느낄 것이 분명하고 일부는 과거보다 더 깊게 그에게 빠져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쪽에 속할까? 사실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한 것 같다. ‘스키피오의 꿈’은 매력적인 이야기지만 한편으로는 ‘핑거포스트’에서 보여주었던 기교에 비해 엉성해진 플롯이 신경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사실 이마저도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왜 ‘스키피오의 꿈’을 읽으면서 매력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디에서인가 이미 읽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왜 떠나지 않는지 모르겠다. 묘하게 비슷한 플롯의 소설들이 머리 속을 떠다닌다. ‘이 문장은 이렇게 실현되꺼야’ 하고 예상하기도 전에 이미 다른 소설들을 통해 익숙한 장면들이 머리 속을 배회한다. 한국에서라면 널찍한 서가의 도움으로 확인할 수 있을 수많은 사실들이 이곳에서는 미지의 영역이다. 지금 나는 그가 무의식중에 그가 읽은 소설들의 이야기들을 결합시켰다는 데에 30%정도의 가능성을 두고 있는데 이마저도 현재의 내 상태에 기인한 착각일 가능성을 고려하면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

어쨌든 이안 피어스의 ‘스키피오의 꿈’은 꽤나 몽환적인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키케로의 ‘스키피오의 꿈’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미 우리에게 ‘스키피오의 꿈’은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설의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는 바로 인물들이 그들이 지닌 변화의 가능성을 모두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등장 인물들은 현대 소설의 전형과는 좀 다르다. 태초에 그들의 행동과 그것이 미칠 영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런 제약 아래에서도 현대 소설이 지니는 전형적인 갈등 관계가 지속된다. 비록 다소 나른한 분위기로 갈등이 진행되더라도 말이다. 아니 되려 이런 고정성이 한층 강력한 아이러니를 제공한다. 너무 강력한 아이러니라서 반론을 제기할 힘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냥 두 손을 놓은 채 분위기에 휩쓸려 갈 정도로 묘한 분위기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나른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는 비극이 되려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점에서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어디에서인가 읽은 결말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4 thoughts on “스키피오의 꿈”

  1. 내일이 니 생일이다. 거기선 음력날짜 잘 모르지? 올해는 윤 7.28이 있는 해야. 지난 윤년처럼 윤7.28도 생일이라고 우기진 않겠지? 뭐 우겨봐야 올 생일은 혼자 보내겠구나. 쯧쯧~ 너 대신 누나가 미역국 먹어줄께~ 메롱~

    1. 미역국 대신 사람이 만든 요리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영국식 가정 요리를 맛보았지. 결국은 도저히 소화가 안되어서 아이팟을 귀에 꼽고 열심히 거리를 배회했어. 참 요즘 면도를 등한시 해서 츄리닝 차림으로 길을 걸으면 수필의 한 장면이 벌어지곤 해. 사람들이 나를 피해서 걸음을 빨리 하는 것이 느껴진다니까.

      이곳의 홍차는 정말 대단할 줄 알았는데 런던에서 제법 유명한 까페에 가보아도 집에서 느끼던 그 맛이 안나와. 결론은 환상은 환상일때 가장 좋은 법이라는 사실이야. 아무튼 생일 선물은 내가 알아서 나한테 줄테니까 그리 알아. 참 블랙웰이라는 미술전문서점이 있는데 그것 하나만은 마음에 들었어. 내셔널 갤러리의 경우 도록이 4권 정도로 나뉘어져 있고 각 권당 14만원 선이야. 가을에 접어들어서 조금 더 느긋한 환경이 되면 자세하게 써서 보낼께. 아무래도 노트북이 완전히 고장나서 편지를 쓰게 되지 않을까 싶군.

      앗. 막판 여름 세일중인데 캐시미어 스카프가 3만 5천원 정도야. 질은 정말 괜찮고 색도 다양해. 구미가 당기면 말해도록해.

  2. 다른 일로 뻘뻘거리고 있는 사이 하이얌님께서 먼저 다 읽으셨군요.^^; 전 이제 겨우 1부를 끝낸 시점입니다. 책 내용은 둘째치고 번역에 문제가 있어서 좀처럼 집중이 안 되더군요. 할 일이 태산인데, 언제나 이 책을 다 읽을지 참 걱정됩니다.;;

    내일이 생일이시라구요? 멀리 계셔서 친구분들에게 축하도 제대로 못 받으시겠군요. 케이크라도 하나 사서 조촐하게나마 축하 파티(?)하시면 어떨까요.(엇. 이게 더 쓸쓸한가요;) 어쨌거나, 생일 축하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랄게요.^^

    1. 스키피오의 꿈이 좀 애매한 물건이더라구요. 빨리 읽으시고 저의 불명확함을 좀 지워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보면 재미난 책인데 번역은 차제하고 두 세권의 소설과 비슷한 플롯이 전개되어서 평하기가 난처하더라구요.

      케이크 대신 와인을 한 병 샀답니다. 즐겨 마시는 와인인데 제법 가격이 싸서 한 병 장만 했어요. 이곳의 저렴한 치즈와 지난 밤에 슬쩍 마셔봤는데 나름대로 즐겁더군요. 생일은 축하 대신 산책과 술 한 잔 그리고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초안을 쓰다가 끝나버린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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