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와 투어리즘

2주 전 처음 이곳에 와서 놀란 것은 미술관에서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관람 매너였다. 이곳의 관람 매너를 자유분방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계모임과 구분이 힘들 정도로 요란한 한국의 관람 매너에 비해 절도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한 주가 지나자 이런 생각이 나의 오해였음이 밝혀졌다. 중요한 것은 관람료의 경중이었다. 관람료가 비싸게 책정될수록, 접근이 어려울수록 관람 매너가 상승한다는 제2급 가격 차별의 예를 미술관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관람료가 비싼 전시회일수록 확실한 기획과 전문가의 엄격한 작품 선정이 뒤따른다. 사실 작품 수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와 작품을 이해하는 눈을 얼마나 열어주느냐이다.  

영국의 많은 갤러리는 대체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갤러리들에서 제대로 된 감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새로운 미술의 역사’를 쓴 폴 존슨의 경고가 머릿속을 끊임 없이 떠다닌다. ‘중요한 것은 많은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걸작을 제대로 음미하는 것이다’  거대한 인파가 쉴새 없이 움직이는 갤러리에서, 더욱이 시간이라는 제약 조건 아래에서 그의 말을 실행에 옮기기는 대단히 어렵다. 결국, 갤러리에 갈 때마다 나의 좌절은 더욱 커진다. 한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아직 보지 못한 작품들을 생각하며 초조함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초조함도 따지고 보면 나의 불민함이다. 갤러리에 걸린 모든 작품을 볼 필요는 없다. 아니 시간을 정해 놓고 갤러리를 모두 돌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 자체가 나의 문제다. 아마도 나에게는 남은 여생 동안 이곳에 올 기회가 꽤 많이 존재할 것이다. 엄청난 규모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은 이상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으며 한 번 들릴 때마다 이해의 폭을 넓히는 또 다른 재미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투어리즘의 대상으로서의 갤러리는 위험하다. 많은 사람들은 유럽 여행을 통해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건축물들을 바라보는 것들을 유럽 여행의 재미로 꼽는다. 솔직히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나 역시 그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곳의 갤러리들은 투어리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투어리즘의 일환으로 갤러리를 찾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행동은 없기 때문이다.

이곳의 무료 갤러리와 박물관에서 가장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은 무지의 향연이다. 사람들이 갤러리를 찾는 이유는 낯선 땅에 와서 무언가 색다른 것을 보았다는 경험을 자랑하기 위해서이다. 지난주에 브리티쉬 뮤지엄에서 난 내 나이보다 세 살 아래 정도의 건장한 청년 셋을 보았는데 이오니아식과 도리아식, 코린트식의 기둥 장식에 관하여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던 그 전시실에서 그들이 나눈 대화는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를 지배하는 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느낀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에 기반을 둔 지루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도리아와 이오니아, 코린트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그 전시실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불만이었다.

문화지향은 오늘날 시대의 화두다. 하지만, 과연 양적성장을 위주로 이루어지는 문화지향이 올바른 것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경제적 풍요는(과거에 비해서) 문화 경험의 빈도와 범위를 넓혔지만 이해의 깊이까지 넓혔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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