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1.
이곳에서 처음으로 필름을 인화했다. 흑백 필름의 경우 한국과 크게 가격 차이가 나는 편은 아니었지만 칼라 필름의 경우 50%쯤 더 비싼 가격이었다. 이곳의 빛이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표면적 이유를 스스로에게 들이 밀었지만 실상 진짜 이유는 그 롤에 속한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결과가 좋은 편은 아니다. 단지 이국적인 풍경이라는 이유로 구도와 빛을 고려하지 않은 채 찍어대는 사진은 필름의 낭비일 뿐이라는 사실을 거듭 깨달았을 뿐이다. 무엇보다 로모로 제대로 된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적절한 노출이 필요한데 단 한 번의 인화로 감을 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필름을 현상한 진짜 이유인 그 사진은 100% 마음에 드는 사진은 아니었지만 분위기만큼은 당시의 느낌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기술적으로는 영 아니올시다지만 그 속에 담긴 사건과 내 기분만큼은 제대로 투사되고 있었기에 비싼 현상료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덤으로 집으로 보내는 엽서에는 긴 팔을 이용해 어렵게 찍은 내 사진을 한 장 동봉했다. 접사가 불가능한 로모로 얻을 수 있는 한계지만 나의 무고함을 알리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또 누이에게 블로그 스킨 제작을 의뢰할만한 사진 한 장을 동봉했다. Caillebotte가 그린 풍경 하나를 훔친 셈이지만 증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죄 또한 없다.

2.
주말에는 Wicked를 보러가려고 계획을 짜고 있다. 10시부터 풀리는 당일표를 얻기 위해서 도착해야할 최적 시간을 열심히 계산해 보고 있다. 런던이 오리지널 캐스팅은 아니지만 지금이 프리뷰기간이라서 할인 혜택이 제공되고 한 분기동안은 오리지널 캐스팅으로 공연이 진행된다고 한다. 도로시에게 어이 없는 죽음을 당하기 이전의 서부의 마녀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며 열심히 스크립트를 구해 읽고 있다. 소설 한 편을 다 읽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3.
단언하건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엽서나 편지를 쓰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적이 없다. 하지만 요즈음은 무슨 말을 쓰던 그 말이 사실과 다르거나, 수신인의 심란하게 만들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결국 애써 써 놓은 엽서를 한켠에 밀어 놓고 아무 것도 쓰지 못한 백지 엽서를 우체통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지금 집으로 보내려고 마음 먹은 엽서 묶음 역시 시간이 지날 수록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다. 모든 것이 나의 모난 성격 탓이지만 나의 성격 탓으로 돌린다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에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7 thoughts on “일상”

  1. 익아!나 소양고사 1등먹었당. 너가 볼떈 뭐 그런것가지고이겟지만
    곧 인사발령이 날것같당. 으하하하. 그래서 인생의 다음 목표 단계로 이동해야것당. 이제 다시 외국서 보조받아 공부할 날이 머지 않은것 같다. 누나 넘 기분좋다..ㅎㅎ

  2. 새로나온 아이팟 중에서 뭘 살까?
    1GB 서플 – 지우개 만해 4GB. 8GB 나노 30GB 80GB 비디오팟

    1. 정장 입고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맨날 가방 가지고 다니면서 선머슴처럼 입어도 무방한 누나의 직장 환경을 고려할 때 저장 공간이 크면 클 수록 좋다는 데에 한 표!

      그런데 현재 우리 집 음악 보유량은 15기가 바이트이고, 그만큼 모으는데 걸린 시간이 짧은 것도 아닌데다가 들을 만한 음악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좋은 음원은 역시 시디에서 직접 추출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누나가 드라마를 아이팟에 넣어서 볼 것이 아니라면 30기가면 충분하다고 판단해.

      80기가 정도면 드라마 시리즈를 통째로 넣어서 볼 수 있는 크기인데 우리는 눈이 나빠서 작은 화면으로 그것 절대 못보거든. 따라서 비디오 팟으로 사되 용량은 좀 작은 것으로 사도 무방하다고 사료됨.

    1. 첫 주는 웬지 훈련소에 있는 것처럼 지나갔다만 이제는 적응을 했는지 제법 여유로워.

      하지만 듣는 능력은 빠르게 늘어가는데 말하는 능력은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고 있어서 답답해 미칠 지경이야. 3000단어가 주어지고 그 단어로만 글을 써야 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해야할까? 게다가 틀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나를 조금 더 버겁게 만드는 것 같아. 틀리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장벽으로 작용한다고 매 시간 시간 느끼고 있거든.

      사진은 들뜬 마음 때문인지 제대로 된 프레임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어. 뭐랄까? 미묘하게 핀트가 안 맞는 사진들만 양산되고 있어. 조금 더 사족을 달자면 차분하게 무언가를 관찰할 여유가 사라진 것 같아. 무엇보다 이제는 풍경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필름 낭비가 줄어든 면도 있고. 영국에서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다리야. 내 키에서 50센티쯤 더 컸다면 정말 대단한 사진이 나올텐데 하고 매일 생각하거든.

      인적이 드문 거리에서 담 위에 걸터 앉아 거리를 관찰하고 있노라면 ‘마차 위의 풍경’을 기준으로 설계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또렷하게 다가올 정도야. 물론 로모인만큼 그런 문제가 한층 심각하지만 어찌되었건 ‘잘’ 정도는 아니더라도 ‘제법 잘’ 지내고 있어.

      참. 답글 보러 들리는 길에 서울 집 주소 좀 남겨 놓아. 노트북이 고장나는 바람에 주소록을 볼 수가 없어. 11살 때쯤인가 지리부도를 보며 나중에 런던에 가면 브리티쉬 뮤지엄에서 엽서를 보내주겠다고 말 했던 것 기억나? 엽서는 이미 골랐는데 주소가 없어서 책상 위에 외롭게 홀로 남겨져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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