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서가와 노트북에서 멀어진 지금 나 역시 별볼일 없는 기억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자꾸 들게 된다. 설마 네 전화 번호를 잊을까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했던 과거가 면목없게도 모바일폰의 전화 번호란 것들은 왜 그렇게 다들 비슷한지 모르겠고 주소란 것들도 까닭없이 복잡하다. 결국 고민 끝에 나중에 면책 특권의 초석으로 사용하기 위한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서두가 길었지만 결론은 ‘제발 주소 좀 남겨 주세요’ 하고 사정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19 thoughts on “Notice”

  1. 영국으로 편지를 쓸까 했는데 국제우편은 우체국에 가야잖아. 편지도 안 보낸다고 투덜대지 말고 시골소녀 사정 좀 봐줘라.
    시골집은 이제 한가해서 정원 꾸밀 준비를 하고 있어. 아마 귀국하면 앞마당에 멋진 죽담이 있을꺼야. 내년엔 죽담에 능소화를 얹을 생각이거든.
    그런데 누나는 언제나처럼 바쁘다. 이번에 아이들 데리고 풍물놀이로 전국대회에 나가거든.
    어쩌면 서울 국립중앙극장에서 공연하게 될지도 몰라. 고생할 거 생각하면 끔찍한데 눈 딱 감고 연습시키려고 – 멋진 경험이 될 것 같아서 – 내가 아프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건지 경력 7년차가 되가니 겁이 없어진 건지… 암튼 나답지 않은 결정이기는 해. ‘장구는 칠 줄 알고 ‘ 뭐 이런 소리는 마라. 나는 못해도 가르칠 수는 있는게 진정한 프로 아니겠냐? ㅋㅋ

    참, 누나 로모 케이스 선물 받았는데. 작가가 수공으로 만든 나무 케이스. 그런데 내 로모가 없잖아. 이그, 어째 나보다 내 물건들이 더 세계여행을 많이 하냐? 완전 아멜리아의 난쟁이가 딱이야. 내 메신져 백, 내 바지, 내 카메라들, 네가 가져간 백팩도 일본에 이집트에 이젠 영국까지 갔잖아. 디지털 카메라는 미국에 이탈리아에 영국까지… 메모리 스틱은 터키도 갔다. 흡!

    손가락에 봉숭아 물 들이는 중이라 더 못쓰겠다. 잘 살아라.
    지금까지 심심해서 괜히 큰일 벌이는 누나 소식이었다.

    p.s 보트 사진 멋지더라. 너가 이제껏 찍은 것 중에 제일이야.

    1. 한통쯤은 해외에서 국제 우편이라는 것을 받아볼 줄 알았는데 나의 오버센스였음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는 와중이야. 하지만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을 곳이 없는 궁벽한 시골임을 감안해서 면책 특권을 부여해줄께.

      친구들의 유럽에서 놀고 있는 내가 부럽다고들 하지만 난 집이 너무 그리워. 서재방에서 진짜 홍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끝내지 못한 책갈피 사이를 배회하고 싶어. 햇쌀로 지어진 밥에 된장국으로 차려진 저녁이 너무 그리운 참이거든. 이제 귀국하면 멋진 죽담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서 집에 가고 싶어진다.

      까유보떼가 혹은 모네가 , 혹은 고흐가 보았을 풍경은 잘 만났어? 꽤나 공을 들여 찍었는데 그 사진조차도 머리 속에 담긴 인상의 70% 밖에 담아내지 못했어. 필름과 현상 기술로는 진짜 빛을 재현해낼 수 없는 것 같아. 그래서 문학과 회화가 사진이 발명된지 백년이 더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이고.

      이곳에 와서 그림을 보는 눈이 조금 더 넓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사실 그림을 많이 보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관찰할 시간이 많아지면서 화가들이 보았을 그 무엇을 상상할 시간이 많아져서야. 버스에 앉아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그들의 일상을 추적하고 그들과 가장 비슷한 모습을 담은 그림을 머리 속에서 찾아내. 사람들의 표정과 얼굴 윤곽, 가슴선과 허리를 관찰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그림을 보는 눈이 성장하게 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모양이야. 방금도 한 스페인 처자의 얼굴에서 벨라스케스가 봤음직한 표정을 발견했는데 아 정확하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잘 지내고 있는 것이지? 난 뭐랄까? 한국의 끊임없이 시험당하고, 노력해야 하는 일상이 그리워. 집이 가져다 주는 나른한 편안함과 조화를 이룬 그런 일상 말이야. 참 요즘은 블랙웰즈라는 유럽 최대의 서점에서 재미난 경제학 책들을 보며 시간을 때우는 중이야. 특히 오일 경제학 파트가 너무 재미나서 점심 마저도 그 서점에서 때우는 중이라면 이해가 되겠지?

      참. 누나가 가장 좋아하는 자화상의 미니 프린트를 샀어. 내셔널 갤러리에 갈 때마다 그녀를 만나는데 매번 다른 표정으로 나에게 인사를 건내. 그녀를 보다가 다른 사람들을 보면 웬지 재미없어 보일 정도니 말 다했지. 어쨌든 요즘은 웨일즈 여행과 네덜란드 여행을 놓고 시기를 저울질 중이야. 만약에 네덜란드에 가게 된다면 고흐를 만나고 와서 그 감동을 문자로 옮겨 볼께. 아마도 감상의 일할도 옮기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1. 아버지께 아침에 전화 드렸었어. 낙도 탈출을 축하해. 하지만 만 운명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항해는 어디든 뒷감당이 안되는 존재들이 암초처럼 널려 있는 법이니까 방심은 금물이야. 그리고 어디에서든 이너서클로 파고 들어야 해. 이물에서 아무리 날뛰어 봤자 고물에서 발령되는 한 마디에 복종해야 하는 법이니까. 아무리 기뻐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괴상한 조어법이야. 우리말을 사랑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존경심은 보여주자고

  2. 그 베스지 뭔지 온천도시는 잘 갔다왔냐.
    혼자서 돌아다니면 심심할텐데 아직 생생한가 보구나. 난 내일 지리산온천이나 가야겠다.
    니 핸드폰 번호를 엄마핸폰에 1번으로 저장해뒀다. 그래야 자주 전화하실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지.. ^^ . 그리고 니가 보낸 사진 봤다. 여전히 변함없는 니 모습도 반갑고, 실이한테 보낸 배사진도 봤다. 진짜 니가 찍은 로모사진 중에 젤루 잘 나온거 같더라.
    암튼 가끔은 전화하마. 잘 지내라.

    1. 바스라는 곳인데. 그냥 혼자서 음악들으면서 걸어다니기만 했어. 참 사진을 세 통이나 찍었는데 느낌상 인화하면 내 로모 인생에서 가장 잘 나온 사진들이 이 롤에서 뽑아져 나올 것 같아. 흑백 1롤, 칼라 2롤인데 자금 여유만 생기면 여기에서 바로 현상할 생각이야.

      바스에서는 5분 간격으로 햇살과 소나기가 교차하는 통에 점퍼를 입었다가 벗었다가 온갖 쇼를 다했지만 매우 편안한 느낌의 도시였어. 기차에서 내려셨을 때 소개장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나 또한 받았다는 사실을 빼면.

      아!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첨가하자면 바스는 빅토리아 시기의 유명한 휴양지라서 이곳 사교계에 들어가려면 그 시대의 예법상 소개장이 필요했을꺼야.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영국 소설에서 읽은 구절이 기차에서 내려 바스에 들어섰을 때 소개장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후회스러웠다. 너무나 낯선 도시 한가운데 떨어진 것 같았다. 뭐 그런 내용인데 그 문장이 바로 생각나더라고.

      아무튼 막내 누나한테 추석 연휴동안 그 사진으로 블로그 스킨 좀 만들어 보라고 이야기 해줘. 지금 것 슬슬 지겨워지고 있는 참인데 나는 노트북이 고장나서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네.

      그럼 추석 잘 지내고. 맛있는 명절 음식 많이 해서 냉장고에 저장해 놓도록 해. 집에가서 다 먹어 치울테니까

  3. 명절음식 저장은 너무 심하지 않냐. 아마 그 때쯤에 먹고싶은 거 리스트를 올려놓는게 더 빠를거 같다. 그리고 온천도시라면서 온천욕은 했냐.^^

    1. 아니. 스파 자체가 관광 상품으로 있기는 한데 가격이 높은 편이라 그냥 포기했어. 먹을 것보다도 급한 것은 다 읽지 못하고 버려두고 온 책들이야. 아마 날 잡고 서재방에서 일주일쯤 보내야 할 것 같아.

  4. hi, I’m DUKIL SUH

    I think that few people realize that UK is very fantastic and beautiful country.
    Also, I often think that your experince is a small but nevertheless important change to you.

    Best regards-

    p.s. Here are my address and Email address.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가 664-1 전북대학교 반도체물성연구센터 215호 561-756 서 덕 일

    Suh Dukil.
    Semiconductor Physics Reserch Centre(SPRC) 215, Chonbuk National University, Deokjin, Jeonju 561-756, Korea

    disuh@chonbuk.ac.kr

    1. 추석은 잘 보냈어? 혹 집에도 못가고 추석마저 너군이랑 같이 보낸 것은 아니겠지? 예전 같았으면 추석 모임이라도 있었을 텐데 올해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이곳에 대한 내 의견은 10대 중반에는 정말 가보고 싶은 곳, 20대 초반에는 너무 바빠서 갈 수 없는 곳. 금년 8월 5일에 세인트 폴의 야경을 보는 순간에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가 다음날부터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해서 스트랫포드 여행을 기점으로 완만한 경사의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중이야.

      어찌되었건 이제 주소도 알았겠다 이번 주말에는 또 다시 엽서 좀 보내야겠다. 기차 속에서 흘려 쓴 글씨라고 너무 구박 말게나.

      the, a, Sp:e, D:a It’s an)

  5. 서재에서 일주일 쯤 보낸 뒤의 결과물 기대하겠습니다.^^ 잘 계신 듯하니 다행이고 일만 하느라 사무실에 짱 박힌 직장인으로서 부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취미생활과 관련하여 최근 뒤통수를 거하게 맞아서 블로그를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주소 유출할 생각도 그 일로 인해 사라졌습니다. 별 볼 거리는 없지만 가끔, 아주 가끔 들러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그곳에선 ‘안지’라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소는 http://anji.mireene.com/zb5/ 랍니다.

    1. 네. 하지만 그 일주일이 허락될지 아니면 곧바로 학교로 직행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답니다. 가능하다면 한 열흘쯤 외출도 삼가고 서재방에서 16시간을 풀타임으로 보내면 좋을텐데 말이예요.

      RSS리더에서 공지를 읽고 댓글을 남기려 했으나 그 시점에는 이미 블로그 자체가 사라진 터라 한발 늦은 발걸음을 아쉬워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주소를 남겨 주시니 고마워요. 그럼 새로운 집에서 뵙겠습니다.

  6. 그래도 누나 블로그에 가끔은 들르나보다. 힘든 일 있냐고 묻는게..
    걱정마, 별 일 없으니까. 그냥 니가 없으니까 쫌 심심하다. 그래서 오늘 west wing 3도 사고 ipod 30GB 도 샀다.

    너 런던으로 옮긴다며? 알지 런던에 가면 누나가 부탁한 거, 누나 공부할 곳 알아봐주는 거 잊지마라. 지금 계획은 1년 이지만 휴직만 가능하면 2년도 생각하고 있거든.
    어학원 많을 테니 상관없고. 아트스쿨 좀 알아봐줘. 입학조건이나 과정, 수업연한, 수업료 등등 구체적으로 누나가 실행에 집중할 수 있는 정보들,, 무슨 말인지 알지? 입학허가를 받으려면 포트폴리오가 필요할 수도 있을꺼야. 지금 생각엔 순수미술을 공부할 생각이거든 (어차피 직업은 있으니까, 취직할려고 공부할 필요는 없잖아.) 아카데믹한 곳이면 좋겠어. 미술사를 함께 공부할 수 있거나. 어학과정이 포함된 곳이면 금상첨화겠지만 큰 기대는 없어. 누나는 개인레슨까지 생각하고 있으니까 폭넓게 알아봐줘.

    누나 사주에 예성이 있어서 중년에 예술가로 대성한단다, 뭐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데는 이유가 있을테니까… 가봐야지 않겠냐? 재능의 유무는 따지지 않고 그냥 꼭 해보고 싶은 거니까… 일이년쯤 투자해도 괜찮잖아. 긴 인생~ 시집가서 애 낳는 거 말고는 이룰 것도 별로 없는데…. 그림보다 오히려 결혼에 더 재능 없는 것은 거의 확실하잖아. ㅋㅋ 아빠도 긍정적이셔. 형편도 나아졌고… 꼭 외국에 가야하는 건 아니지만 누나에겐 선생님이 필요한데 여기선 여의치 않잖아. 대학에 다시 갈 수도 없고…

    개인적 만족을 목표로 그림을 그린다는게 요즘 세상엔 우스운 일로 보이겠지만 사실 그게 진정한 예술 아니냐? 대가들의 작품을 많이 감상하고 있는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아무튼 너도 지금 낯설고 어려운 거 알지만 부탁한다. 너 있을 때 충분한 정보를 얻으려면 이 건에 대한 빠른 의사교환이 있었으면 좋겠다. 대신 너 오면 맛난거 다 해줄께.. 말만해…

  7. 경비 모자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라. 누나 카드를 쓰던가..

    1. 일단 오스트리아 거쳐서 피렌체 갈 때까지는 문제 없을 것 같아. 문제 생기면 곧바로 전화할께.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 통장 잔고를 모니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열심히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안되어서 그냥 현지에 가서 되는 대로 돌아다녀 보려고. 고마워

  8. 이탈리아 기차 예매한 것을 빈역에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사이트엔 이탈리아 내에서만 살수 있는 것으로 나와있어서 말이지..
    이탈리아 것만 예매할까?

    1. 알아보니 주중에는 현지에서 사는 것도 힘들지 않을 것 같아. 지금 이 즈음은 여행하기에는 최악의 계절이라서 아주 한가할 것이 분명하거든. 아무튼 필요한 것 생기면 바로 바로 전화할께.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