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ndinsky-the Path to Abstraction

 오랜 시간동안 칸딘스키는 이해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혼란스런 이미지와 색채의 향연 앞에서 내 안목으로 이해 가능한 무언가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록이 아닌 작가의 붓질이 살아 숨 쉬는 진짜 작품과 조우하는 순간 칸딘스키의 작품들이 성큼 이해의 영역으로 걸어들어 왔다. 미술관을 찾는 즐거움인 낯선 작가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뺨과 입가에 걸리기 시작했다. 칸딘스키의 작품에서 내가 처음 발견한 것은 혼란스러운 지난 세기의 시작과 세상의 종말이라고 믿기 충분한 전쟁의 여파, 그리고 분열되어 조각난 육체의 이미지였다. 도록으로 읽는 칸딘스키의 작품이 난해한 형태로 구성된 추상이었다면 실제 그의 작품이 말하는 의도는 완전 추상의 한 단계 이전인 구상과 추상의 미묘한 경계선이다. 추상에 가깝지만 현대 작가들이 보여주는 추상에 비해서는 한결 이해하기 쉬운 단계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소 가벼운 주제의 작품들을 머릿속에 담은 채로 퍼즐을 맞추다보면 누군가의 나신이 들어난다. 지금껏 이해할 수 없었던 기호였던 것이 여성의 가슴과 엉덩이로 인식되기 시작되는 것은 왜일까? 퍼즐 맞추기 끝에 머릿속에 결합된 하나의 이미지를 칸딘스키 자신이 보고자 했던 예술적 환영이라고 믿는 것은 오만일까? 하지만 나 스스로에게 가장 놀라운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혼잡한 덩어리 속에서 보이기 시작한 육체에 놀라기 보다는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칸딘스키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때로 타로 카드를 읽는 것과 비슷하다. 이미지에 투사하는 자신의 의도가 곧 해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석에 관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미 구상과 추상이 연결되는 통로에 서있는 그의 작품 속에서 그 자신조차 구상과 추상을 완벽하게 구분해 내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진한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진지한 표정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낯선 나라의 여성들이 사랑스러워 보이기 시작한 때가. 칸딘스키가 그린 육신의 편린들을 피가 도는 진짜배기 사람에게서 찾기 시작한 때야말로 칸딘스키와 벗하기 시작한 순간이 아닐까? 더 이상 칸딘스키는 미지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이제는 옛날보다 애할 것들이, 아름다움에 취해도 될 것들이 늘어났을 뿐이다.

P. S.
애슈몰린 박물관에서 다시 한 번 칸딘스키의 작품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근래의 애슈몰린 박물관은 확장공사관계로 주요 섹션이 폐쇄되었는데 우연찮게 열린 문을 통해 테이트 모던에서 회수된 그림을 어둠 속에서 만나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떠있는 칸딘스키의 풍경화는 묘한 느낌을 선사한다. 언어로 확언하기 힘든…….

P. S. 2
퐁피두 센터에서 다시 만난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면서 그리고 벽면을 채운 의미를 알 수 없는 현대 작가들의 추상 미술을 바라보면서 과연 칸딘스키가 추상 미술의 영역에 속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그들과 비교하자면 칸딘스키의 작품에 쓰인 소재들은 너무나도 확연한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같은 순수 추상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추상이 아닌 것도 아닌 두 세계를 잇는 통로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제일 나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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