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veat viator!(Let the wayfarer beware!)

 내가 삶에서 가장 아끼는 시간들은 서시처럼 아름다운 처자와 해후하는 순간도, 아드레날린을 분비해 가며 역전의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 순간도 아니다. 정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들은 서재방에 앉아, 혹은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며 책장을 넘기려는 찰나다. 재미난 소설을 만났을 때 내 뺨에는 기분 좋은 웃음이 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재미에 온몸이 떨려 온다. 문장에 춤추는 내 정신은 어느 사이에 소설 속 한 장면으로 걸어들어 가고 있다. 주인공들의 호흡에서 내 삶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들을 동경하는 동시에 경멸하며,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해 마지않는다.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보다 더 강렬하게 몰아치는 감정의 범람을 지켜보면서 가끔은 나 자신이 또 다른 피그말리온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어떠랴.

서재방에 넉넉한 쇼파를 가져다 놓았다. La Traviata를 틀어 놓고 넘기는 의무감의 펄프 덩어리와 밀린 책들 속에서 숨을 쉬고 있노라면 마음속에서 번뇌도, 즐거움도 아닌 애매한 감정의 덩어리가 느껴진다. 아직까지 이 감정의 덩어리를 정의하는 정확한 말을 찾아내진 못했다. 그냥 사람이란 존재가 실존하기에 갖게 되는 범주화되지 않은 감성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해답을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뭐가 대수랴? 삶에는 이것 말고도 답을 모르는 문제가 무궁하다.

근래에는 막내 누이와 <환상의 커플>이란 드라마에 빠져 있다. 만화처럼 유치한 드라마에 홀딱 빠져 버린 내 모양새가 우습지만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이유는 분명하다. 잘난 척하며 고상을 떨어보지만 사람이 느끼는(혹은 내가 느끼는) 감정의 베이스는 그렇게 다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질감을 자극하면서도 기분 나쁘게 만들지 않는 그 재주에 그냥 져주기로 마음먹고 나니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친 김에 조금 더 선심을 쓰자면 감정의 맥문을 틀어쥐고 쥐었다 놓았다하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펄프 덩어리를 푸는 실력이 어떤 영역에서는 과거보다 나아진 부분도 있는 반면, 어떤 영역에서는 참으로 고지식해진 부분도 있다. Cunning이란 단어를 좋아하던 나였는데 어느새 우직한 인간이 되었나 보다. 우직한 인간의 삶은 늘 이용당하고, 상처 입으며, 가슴 속이 숯 덩어리가 되는 숙명을 따른다. 우직한 인간의 삶은 아름답지만 아름다운 삶보다는 편안한 삶이 더 좋다.  

어느 사이 스물일곱 수다. 이제는 십년지기란 말이 평범해졌고 청춘에 얽힌 소소한 이야기들 역시 나이를 먹었다. 나이를 먹은 것은 비단 추억만이 아닌 모양이어서 그마저 거의 남지 않은 생기발랄함과 사랑에 대한 갈망을 함께 잃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음모로 석류를 먹고 반년은 내 세상 반년은 딴 세상에서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한다. 해야 할 일들은 많지만 해놓은 일들은 없는 이 나이를 저주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만은 그 저주마저 귀찮아져 백 원짜리 하나 쓰기 쉽지 않은 산골에서 새해의 첫새벽을 맞았다. 스물일곱 수의 첫 시작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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