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常 小考

 봄처럼 포근한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멀리서는 따사로운 햇살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강아지는 창문 아래에서 호기롭게 낮잠에 빠진다. 그런 강아지를 보며 초쿄파이 1/4조각으로 잠을 방해하는 것이 요즘의 내 일과이다. 바쁜 식구들을 대신해 집안 청소며, 설거지를 도맡아 하는 착한 아들 노릇도 해보고, 외출할 의도가 없음에도 착실하게 면도를 해본다. 열흘 가까이 사람 구경조차 못했음에도, 매력적인 향으로 꼬일 사람이 없음에도 샤워 후에는 스킨과 로션으로 스스로를 꾸민다. 게다가 마무리로는 향수까지 뿌려본다. 덕분에 서재에서는 늘 은은한 사과향이 맴돈다. 책상에 앉아 연필을 붙잡고 있노라면 손목을 타고 오르는 연한 향에 마냥 행복하다. 봄 분위기가 나는 푸른색 스프라이트 셔츠를 입고, A8을 타고 흐르는 Rita Calypso의 목소리를 친구 삼아 책장에 빠져든다.

왼손은 무의식적으로 찻잔을 찾아 책상을 헤맨다. 몇 해만에야 화해한 Earl Grey는 서서히 나를 중독 시키고 있다. 햇수로 따져보니 만으로 4년을 꽉 채운 냉전 기간이었다. 가끔은 12시가 넘도록 깨어있는 밤들이 있다. 그런 날이면 음악을 친구 삼아 창밖을 바라보며 겨울밤의 별자리를 감상하는 일 대신 예전처럼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싶기도 하다. 낮에도 제대로 전화를 챙겨 받는 일은 좀처럼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통화와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3년하고 몇 개월만의 일이다.

화해는 그것만 아니다. 에드몽 당테스가 메르세데스에게 말했던 ‘스물 넘은 사내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있은 지 4년 만에 다음에 만날 진짜 약속을 했다. 다음에 만날 약속이 뭐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일까 의아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다음에 만날 약속이란 나에게 그 어디에도 견줄 바 없는 귀한 선물이나 진배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자, 나를 안도하게 만드는 말. ‘까다로운 기호 덕에 만족을 모른다’ 라는 편견을 사긴 해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은 단순하다.

‘다음번에는 커피 한 잔’. ‘다음번에는 영화 한 편’, ‘다음번에는 뭐’. 오늘이 끝이 아니라 다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정말 중요하다. 맺고 끊는 것이 불분명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연연하는 것은 아니지만 잃고 싶지 않은, 잃게 되면 너무나 큰 박탈감을 감수하게 될 인연들이 나에게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 것들이 바로 나란 인간의 ‘살아 있는 갈대들’이다. 그 ‘살아 있는 갈대’가 있기에 난 기록상의 존재가 아닌 순간의 마음과 기분을 나눌 수 있는 진짜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P.S.
『보헤미안 스캔들』을 다시 읽다 주석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In his eyes, she(the woman) eclipses & predominates the whole of her sex’ 잠시 마음을 맡길 수 있는 나무 그늘 혹은 의탁처가 되진 못하더라도 지금껏 내가 받은 느낌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문구는 없을 듯하다. 아울러 이번 주는 정말 바쁜 한 주가 될 듯하다.

그리고 상경 일자를 되묻는 친구들에게 대답하자면 설 이후에나 지금 만끽하고 있는 고요한 평화에서 벗어나 인세로 돌아갈 예정이다. 몸이나 마음이나. 자신감이나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은 상태다. 물보다 차를 더 많이 마시는 것이 탈이긴 하지만, 음지를 이용해 보는 영화 속의 거리들을 내가 걸어보았다는 것에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이 곳이 탈속한 곳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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