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자들의 도시

역자 후기와 조우할 수 밖에 없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조차 나는 엄두가 나지 않는 그리하여 누구도 답을 알려줄 수 없는 수수께기와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수수께끼의 답이 정말 난해했던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진실이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흠잡데 없이 노련했던 대가가 자신의 작품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전혀 다를 바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던 걸까? 그의 선고가 단지 추인에 불과한 것이라면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애초에 사형선고가 아니었던 것인가? 이것마저도 대가가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기법에 불과한 것인가? 그의 절망감과 위화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모든 냉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일 수 있었던 그의 시선이 왜 희망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노대가가 발견한 삶의 진실이 결국은 눈을 감은 것이나 뜬 것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라는 선문답인 것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좋은 독자가 되는 요령은 의외로 쉽다. 그것은 작가가 의도한 방향대로 이야기의 흐름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이 쉬운 일이 요령부득한 일이 되기도 한다. 너무 어렵고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에 지침은 엉뚱한 권장 사항이 되어 버린다. 문장을 읽지만 행간에는 한 발자국도 접근할 수가 없다. 도대체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에는 어찌해야 하나? 망망대해에서 삭구를 잃은 범선처럼 책갈피 사이를 표류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그리 많지 않다. 노대가의 인터뷰를 추적해서 그의 진짜 의도를 파악해 본다든지 아니면 반복적으로 문장을 음미해 본다든지 하는 정도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들이다. 하지만 이런 대안들마저 녹록하고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방금 전에야 깨달았다. 대가의 실수쯤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덮어 놓고 좋은 소설이라고 우겨댈 수 있는 무모한 용기가 나에게도 있었다면 하루를 얼마나 쉽게 살아갈 수 있을까?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으면서 나는 이야기 속에 아로새겨져 있는 정치적 메시지를 확인하는 일을 거부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서의 내 일부분은 현실을 살아가는 다른 부분보다 결코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정치적 함의에는 눈을 감은 채 인간의 본성이라는 주제로 밑그림을 그리며 소설을 읽어나갔다. 그런데 『눈뜬 자들의 도시』는 상황이 다르다. 이제는 눈을 감지 않는 이상 그가 말하려는 의도를 넌지시 무시할 수 없다. 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집요하며 그의 절망은 깊고도 무겁다.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우아한 세련미를 포기했다. 세련미를 포기하는 대신 그는 독자들을 종잡을 수 없는 혼란상태로 몰아갔다. 그가 야기한 혼란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며 혹여 답을 찾는다고 해도 그것을 내 삶에 적용시킬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가야만 한다’

8 thoughts on “눈뜬 자들의 도시”

  1. 지난 13일 밤에 저지른 만행(폭언과 횡포)에 대하여 극구 사과드립니다.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밥 한끼 사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찬익씨 손수건이 제게 있어요. 그것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날 혹시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굴어서 비극적이게도 더는 만나고 싶은 의향이 없으시면, 손수건은 우편으로라도 보내드리겠습니다.

    1. 정말 미안하고 잘못한 사람은 저인걸요.사실 실수로 유리창을 깨고 도망친 소년처럼 마냥 불안하기만한 한 주였답니다. 5월 초에도 괜찮을까요?

  2. 저는 한 주 동안 지구를 뜨고 싶었어요. 그리고 안 만나주시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손수건을 소포로 보내기엔 좀 그렇지 않겠어요. 그날 잘은 몰라도 제가 찬익씨를 때렸던 거 같아요. 드시고 싶은 거 다 사드릴게요. 아, 5월 초 좋아요.

    1. 지구를 떠나기에는 아직 못가본 곳도 많고, 못해본 일도 너무 많지 않겠어요? 한고비 넘긴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3. 어제 읽었다. <파이이야기>를 읽고 난 후와 비슷한 황망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가야만 한다”
    다음 문장을 이어보자면….

    “그러므로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이렇게 위안을 삼으라는 건지?

    1. ‘해피엔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가야만 한다’가 더 옳은 해석 같아. 마지막에 죽은 강아지는 작가가 모든 소설 속에 심어둔 일종의 분신인데 그것을 죽임으로써 어떻게 보면 작가 자신의 죽음(의지적인 죽음일 수도 있는 어떤 것)을 선언할 것일 수도 있고, 더 이상 희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한 것일 수도 있어.

      그 남자의 맨 마지막 문장 덕분에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그럼에도 인간은 살아가야만 한다가 된 것이 아닐까 싶어. 파이 이야기의 경우에는 그럼에도 인간은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라는 명제가 성립되었지만 말이야. 그러니 위안을 삼을 것이 없이 그저 황망함을 견디어야 해.

  4. 눈먼 자들의 도시의 후속작 눈뜬 자들의 도시를 빌려 읽었습니다. 시점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 4년 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책에서는 법적으로 시민이 행사할 수 있는 표 가운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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