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유령

 장 끌로드 카리에르를 알게 된 것은 열아홉 가을의 일로 기억된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그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는『시간의 종말』의 저자 가운데 하나로써 유명한 영화 각본가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가 개진한 밀레니엄이 불교 철학적 색채를 띄고 있었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인가 여유가 되면 그가 지닌 높은 철학적 사유가 반영된 영화를 꼭 한번 보겠다고 다짐했던 기억도 함께 난다. 이것이 『고야의 유령』을 통해 다시 한 번 그와 조우하기 전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에 관한 단상이다. 그렇다면 밀로스 포먼은 어떤가?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내 친구들에게 <모짜르트>는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는 숨기고 싶은 거울로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우리 내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그 어떤 마음이 실은 ‘질투심’이란 것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것을 숨겨야 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운 이로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이런 첫머리는 어딘지 재미없고 거만하며 지루하다. 그보다는 17살에 본 <Everyone says I love you>에서 나탈리 포트먼 공연한 엉뚱한 캐릭터에 반한 여파가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는 설명이 한결 나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설명에는 한가지가 부족하다. 어째서 극장에 걸린 포스터를 보는 순간 티켓팅을 하는 대신 소설을 먼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 말이다. 아니면 이런 설명도 괜찮을 것 같다. ‘나체의 마야’가 내가 본 처음 전신 누드였기에 ‘고야’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어쩔 수가 없었노라고.  스물 셋 여름, 내가 오랜 시간동안 감상한 판화집이 고야의 것이기에 어쩔 수가 없었노라고. 그가 그린 지옥의 이미지를 담았다는 소설 앞에서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노라고.

 사실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고야의 유령』을 읽으면서 떠올린 소설은 『수도원의 비망록』이었다. 전혀 다른 이야기임에도 어째서 블리문다가 떠올랐는지 다소 의아하다. 약간의 시간차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비슷한 문화권에 속한 소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고 주인공들이 겪었던 운명의 엇갈림에서 받은 인상을 고스란히 『고야의 유령』에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불분명하고 모르는 것투성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도 있다. 이 소설은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쓰였지만 실상 영상화가 필요 하지 않은 소설이란 사실이다. 영화 따위는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한편의 영화를 감상한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만약 독자가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이베리아 전역과 벨라스케스가 봉사한 마지막 스폐인계 합스부르크 왕조의 불운과 권태로운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촌스러운 로로코 궁정에 대해 알고 있다면, 정치에서 종교재판소가 지녔던 위상과 몰락을 알고 있다면, 거기에 더해 고야의 화폭들을 머릿속에 담고 있다면 소설은 영화를 보는 것과 동일한 느낌을 선사한다. 문장을 통해 시선이 움직이는 방향에 위치한 모든 것들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은 너무나 충실하게 역사적 사실들을 반영하고 있고, 인물들의 고뇌는 한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며 캐릭터들은 시대의 급류에 휩쓸린 희생자들의 역할에 너무나 충실하다. 하지만 이것 전부가 아니다. 이 소설에는 감정의 강도를 채색하지 않았다는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작가가 일부러 칠하지 않은 공간은 독자의 몫이며 이를 통해 다양한 인상을 창조해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저 단조로운 서술 경향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영상은 분명 좋은 매체다. 그러나 가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중요한 메시지를 의도하지 않게 놓치게 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완벽할 정도로 모든 것을 ‘보여주기’에 성공한 소설은 시각적 이미지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최소화시켜 줄 수 있다. 역자는 이 소설을 영상화를 위한 의도로 창작된 소설로 평가했지만 개인적인 소감은 소설이 영상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다는 가정에 대한 실험으로 보인다. 영상에 익숙하고 기억 속에 수많은 시각적 이미지를 간직한 우리 세대는 누구나 훌륭한 감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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