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사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 뭣하면 나한테 오면 되는 것 아니겠어’라고 말하곤 했던 친구가 있다. 그 말을 던질 때마다 농담을 가장하긴 했지만 기실 마음마저 허튼 농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겠지만 그런 농담은 순천연한 농담이라기 보다는 슬쩍 마음을 떠보는 치사한 수작에 가깝다. ‘안녕’이란 인사와 ‘다음에 보자’라는 인사를 구분하는 나쁜 버릇을 지닌 나로서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서른쯤 되면 우아하지는 못해도 거짓말 같지는 않은 말을 던지게 될 줄 알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조차 없는데 녀석의 마음이 단호해지기 전에 내가 먼저 확신을 가지게 될거라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니 마음 한구석으로는 드라마나 소설에나 어울릴 상황 전개를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서서히 나이란 것을 먹고, 그러다 보니 쌓인 신뢰와 시간이라는 덫에 물리는 상황 연출을 말이다. 그렇기에 ‘좋긴 하지만 이제와 새삼스럽게’란 말로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자 했던 친구들의 시선을 속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후회할 것이라는 친구들의 협박에 ‘나중에 술 한잔 마시면서 털어버리면 되는 것 아니겠어’ 하고 대거리를 했던 만용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불순물이라고는 섞여 있지 않은 녀석의 단호함과 마주하고 나니 이래저래 입맛이 쓰다. 연인이 아니라 머슴을 찾는 것이 아니냐고 쏘아줬지만 녀석에게 비춰진 난 ‘Love is the only thing I wonder’이라고는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사람임이 분명하고 거기에 더해 고집쟁이에 헌신 따위는 모르는 사내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이 글을 읽고 ‘나 같은 미인을 좋아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미안한걸’ 이라며 웃음을 터트릴 것이 뻔한데 내가 왜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부터라도 모호함을 버리고 ‘I hope to write on your empty page’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출사표를 쓰는 셈이라고 위안해보지만 변명치고는 참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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