愛貰冊論

어린 시절부터 나를 보아온 친구들은 지금의 모든 노력이 먼 훗날 연애소설을 즐길 줄 아는 곱게 늙은 노인으로써의 삶을 위한 준비 과정이란 사실을 인정한다. 이것은 그들이 잘 내려진 커피 한 잔과 함께하는 재미난 소설 한 권에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수없이 봤기 때문이다. 지금 막 달콤한 입술을 훔친 사람처럼 만족감에 빠진 내 표정을 기억하고 있으며, 입으로는 ‘서시 같은 미녀’를 입술에 달고 살아도 내가 좋아하는 것은 탐독증에 걸린 사람마냥 책을 먹어치우는 삶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심이랄지 야망이랄지 것들이 남보다 부족하지는 않지만 기나긴 삶 동안 야망 하나만을 지주로 삼기란 무리다. 신내림을 받아 작두에 올라탄 이의 무아지경처럼 책을 읽는 동안의 나 역시 그런 몰아에 빠진다. 문장이 지니는 독특한 호흡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잊는다. 그때의 평화로움과 행복감을 알기에 되려 난 감정이 폭포수처럼 흐르는 진짜배기 사랑에 서투른지도 모르겠다. 진짜 사람사이에서는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복잡한 수사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라든지, 세상 여자 모두가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독심술의 대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자주 잊곤 한다. 게다가 진짜 사람사이에서는 세상이 얼어버린 듯 멈추어버린 시간의 공백이 없다. 오 맙소사! 

친구들에게는 애완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든지, 정치적 성향이 유사한 사람과 결혼하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실상 내가 빠져보고 싶은 사람은 훌륭한 서가를 소유한 사람이다. 읽기는 했으되 주머니 사정으로 사지 못한 특정 시기의 유산들을 보물처럼 품고 있는 서가도 좋고, 읽으려 마음 먹었다가 흐지부지 되어버린 책들로 꽉 찬 서가도, 나와 비슷한 취향으로 가득 채워진 서가도 좋다. 굳이 많은 장서를 자랑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질이지 양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안목이 기호를 말하는 시대가 아닌가? 게다가 운이 좋다면 『Ex Libris』의 저자처럼 서재를 결혼시킬지도 모를 일이다.

근래 들어 입에 올리기 시작한 새말 가운데 하나가 서점증후군이다. 자발적 독신증후군에 이어 친구와 주거니 받거니 이어지는 대화의 새로운 소재인데 요약하자면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기 보다는 되려 아름답다는 이야기이다. 둥그런 허벅지와 부풀어 오른 가슴을 지닌 립밤으로 윤을 낸 입술의 여자보다는 에밀 아자르를 읽는 여자가 더 눈에 띄는 법이다. 키엘 립밤을 쓰냐고 말을 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로맹가리와 진 세버그의 이야기로 말문을 여는 것은 쉽다. 굳이 대문자로 쓰인 폴리오가 무엇인지 인큐내뷸러가 무엇인지 몰라도 된다. 그저 드라마보다 소설을 소설보다 나를 조금 더 좋아해주면 그만이다.

P.S.
장난 반, 투정 반. 나머지는 하릴 없이 내리는 지겨운 비때문에

4 thoughts on “愛貰冊論”

  1. 두번째 문단 중간부터 마지막 부분까지를 읽으며 감탄 섞인 웃음을 지었습니다. 가끔 책과만 마주하다가 겪던 일이라서요.

    비가 내린다고 하는 것을 보니 서울이 아니신가보네요. 서울은 더위는 한풀 꺽이긴 했는데 아직도 조금은 더워요.

    전 선선한 바람이 불어야 공부가 된다는 이 동네 속설만 믿고 8월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답니다. 모든것이 다 있는데 아무것도 없이 혼자 지내는 여름이 참 힘들었던 것 같네요.

    1. 훌쩍 집으로 떠나서 소설 몇 권과 뒹굴거리다가 며칠 전에야 올라왔거든요. 지금은 다시 강의실에 못내 지겨운 표정으로 앉아 있답니다. 신선한 바람은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상징 같은 것인데 아직 마음만큼 바람이 시원하지는 않네요.

      참. <<로마의 일인자>> 시리즈를 구하셨다면서요. 너무 늦기 전에 다시 서가에 꽂아 놓아야 할 텐데 마음만 앞설 뿐 찾으려는 노력이 쉽지 않네요.

  2. 몰 돌려서 말해…
    나 연애 기술이 서툴러 애인없어 외롭삼… 이라고 한줄로 쓰면 되겠구만.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