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다마링크

과거에 비해 많은 수는 아니지만 여전히 불어권 소설들은 꾸준히 번역되고 소개된다. 그 가운데에는 한 사람의 작가로 인정받기에는 아직 일천한 젊은 글쟁이들의 소설도 꽤나 된다. 그리고 이런 이들의 신간에 대한 서평인지 광고인지 구분하기 힘든 기사가 게재될 때마다 난 틀림없다 싶을 정도로 ‘enfants terribles’란 표현과 조우하게 된다. ‘무서운 신예’라는 덧붙임말과 평단의 호의를 받고 있는 전도유망한 작가라는 실체를 확인하기 힘든 추측성 코멘트와 함께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하지만 요즘에 들어서는 이런 신예들의 소설을 읽게 될 때마다 쓴 웃음이 입가에 걸리곤 한다. 어린 시절 콩쿠르상 수상작들을 읽으며 등을 기대었던 정든 서가를 배신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기 때문다. 며칠 앞 둔 시험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 따위는 잊어버린 채 책을 벗 삼아 보내던 나른한 주말 오후를 송두리째 부정당한 듯한 허허로움이 느껴진다. 도대체 왜 일까? 왜 이리 재미가 없어진 것일까?
 
『스키다마링크』의 작가 기욤 뮈소는 공인된 ‘무서운 신예’이고, 『스키마다링크』는 음식과 술에 대한 열정, 프렌치 키스-정확하게는 프랑스식 패팅- 같은 대화, 부정확한 공간적 배경과 너무 ‘americaine’같은 여자 캐릭터를 제외하면 프랑스 작가가 쓴 소설 같지 않다. 프랑스 작가 특유의 예리하다면 예리하고 신경질적이다면 신경질적인 섬세한 펜의 휘두름이 없다. 대신 이 소설을 채우는 것은 의도적인 비웃음인지 아니면 취향의 변화일지 모를 공항소설 같은 상황 설정뿐이다. 마치 토마스 해리스의 저주받아 마땅한 시리즈를 프랑스인이 필사한 듯한 소설이랄까? 이제는 프랑스 작가 역시 존 그리샴 혹은 댄 브라운처럼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박수를 쳐주어야 하는 시대가 된 모양이다.  

헐리우드의 영향으로 프랑스풍의 유머나 간통을 다양하게 변주한 프랑스 영화들이 극장에서 사라진 것처럼 프랑스 소설 역시 다르지 않다. 수많은 프랑스 소설 속에 이제는 프랑스계 미국인들이 등장한다. 주인공들은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미국계 거대 자본과 사투를 벌이고 프랑스는 이제 영광이 아니라 실리를 쫓는다. 68혁명의 전위 세대가 부모가 되고 노인이 되어가면서 혁명을 담았던 정신은 그 찬란한 광채를 잃고 뿌옇게 희미해져 간다. 앙드레 말로가 드골의 장례식장에서 읊었다던 ‘마지막 기사’의 시대가 왜 이리 아련하게 추억으로 다가오는지. 더 이상 ‘인간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가?’란 화두를 나 대신 고민해줄 작가들과 조우하지 못할 것 받은 조바심 때문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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