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노르만 왕조 시대의 영국을 다룬 소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소설은 앨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시리즈이다. 이 소설은 스티븐슨 왕과 마틸다 사이의 내전을 배경으로 노르만인이자 전직 십자군 출신인 수사 캐드펠이 사건의 해결사로 등장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중세판 탐정 시리즈이다. 시리즈의 모든 에피소드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한때 이 드라마는 텔레비전 네트워크를 타고 거나한 인기를 누렸던 시절도 있다. 더욱이 이 시리즈는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월리엄 수사의 캐릭터에 영향을 미쳤고 황금단도상의 단골 노미네이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캐드펠 시리즈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설령 안다하더라도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캐드펠 시리즈 하면 본격적인 탐정 소설에 비해 디테일과 분위기에 치중한 나머지 지루함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평판이 따라 붙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그렇다면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은 어떨까?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이 소설은 캐드펠 시리즈의 20권에 달하는 추리들을 한 권에 축약 시킨 것이나 진배없다. 거기에 강이나 운하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이라는 영국 소설의 단골 소재를 반복하고 있다. 투덜이 헨리 2세와 그의 치세가 얼마나 다양한 측면에서 문학적으로 형상화 되었던가?  해부 전문가인 살레르노 출신의 여의사라는 캐릭터의 특출남을 제외하면 다른 이야기와의 차별성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추리 기법은 또 어떤가? 추리 소설에 인생의 일정 기간을 아낌없이 던진 독자라면 이런 소설에 명쾌한 실마리가 밝혀져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사실에 익숙하며, 따라서 직관을 사용해 손쉽게 범인을 유추할 수 있다. 아니  변태 성욕을 지닌 전직 십자군 기사와 수녀는 너무 식상한 조합이라 직관조차 필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캐드펠 시리즈보다 훨씬 재미나다. 세부 사항을 하나씩 비교해보자면 사건의 배경이 내전 시기에서 헨리 2세 시기로 약간 늦추어졌다는 정도나, 외상의 전문가가 될 수 밖에 없는 힘든 원정을 치룬 전직 십자군 기사이자 현직 약초 담당 수도사인 캐드펠이 아델리아라는 캐릭터로 대체되었다는 정도를 제외하면 기본 골격에서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작은 차이가 소설의 재미에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캐드펠 시리즈에서 캐드펠은 알 수 없는 비밀을 지닌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내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양측 모두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묵계 속에 있다, 그는 기사의 용맹과 브레타뉴 궁정인의 감성 마지막으로 노련한 노인의 지혜를 두루 갖추고 있기에 탐정의 불가침성이란 특권을 누린다, 반면 아델리아는 늘 강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중세의 여성(물론 작위와 영지를 한량 남편 대신 경영했던 똑똑한 예외들은 그  시대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투쟁이 필요했다. 괜스레 고다이버가 인기 상표가 된 것이 아니다)이 받을 수 밖에 없는 불평등과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더욱이 그녀는 조력자들을 생각보다 그녀를 지키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 결국 폭력에 노출된 여의사이자 해부학 전문가로써의  캐릭터에게 독자를 몰입하게 만듦으로써 이 소설은 빈약한 추리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끌어당기는 마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추리 소설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이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의 경우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사용하거나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사용함으로써 추리 필요한 플롯과 단서, 속임수를 객관적인 방법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한다-1인칭 관찰자조차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캐드펠 시리즈에서 수도사의 두건 속으로 캐드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 어떤 표정으로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델리아의 속마음은 투명하게 독자에게 드러난다. 그녀의 두려움과 고민은 명시적으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마치 그녀가 그녀 속에 숨어 있는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네듯이. 그리고 이런 시점의 변화는 형편없는 추리물임에도 불구하고 극적 긴장감을 고조 시킨다. 그렇기에 이 뻔한 소설이 한번 잡으면 손을 땔 수 없을 정도로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 것이 아닐까?

4 thoughts on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1. 와우, 재밌겠는데요. 중세의 여자 의사 탐정이라니…

    캐드펠 시리즈로 말씀을 시작하셔서,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했네요. 드라마로 제작된 <캐드펠> 시리즈에서 캐드펠로 나온 양반이 바로 데렉 자코비 영감님, 그래서 그 시리즈를 보고싶어 안달내 하던 적도 있었어요. 이 양반 너무 좋아하는데, 얼마 전에 <우리 유모는 마법사>인가, 거기에서 단역 비스무리 하게, 아주 코믹하게 나오신 거 보고 뒤집어졌었지요. 그나저나 원작소설은, 출판사 사람 안다고 전집을 싸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던 아는 분 말을 믿고 있다가 결국 연락이 끊어져버린 탓에 앞의 두 권만 갖고 있고, 그나마 읽은 건 첫 권인 [성녀의 유골]뿐이라는… 잊고 있다가 생각났네요. 이번 기회에 끝까지 파버려야겠습니다. 좋은 책들, 소개시켜주시고 새삼 또 기억도 환기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1. 저는 데렉 자코비가 <언더월드2>에서 비운에 사망한 뱀파이어 로드로 나왔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캐드펠 시리즈때보다 휠씬 인자하고 자상한 외모라서 나도 저렇게 늙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캐드펠 시리즈는 전집으로 판매하던 그것이 작년에 절판되었답니다. 저 역시 염가에 사들일 수 있을 때까지 버틴다는 것이 간발의 차이로 놓치게 되었던 차라 가끔 헌책방을 뒤지기는 하는데 깨끗한 전질을 구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더라구요.

  2. 캐드펠 시리즈가 벌써 절판인 줄 몰랐네요. 브라운 신부 시리즈와 함께 나중에 구입하려고 남겨놨거든요. 브라운 신부 마저 동나기 전에 구입해야겠네요.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관심 두고 있던 책인데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 책을 순전히 추리적 즐거움을 위해 읽은 분들은 확실히 실망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사실 저도 잠시 주춤했는데, 그냥 읽어보고 스스로 평가하자는 생각으로 그저 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지금 먼저 읽으려는 책이 있어서 대기중이에요.) 그런데 찬익 님이 먼저 리뷰 쓰셔서 잘 참고하고 갑니다.

    <당신들의 조국> 리뷰도 즐겁게 읽었습니다. 새삼 책의 내용이 생각나면서 재연(?)의 즐거움을 맛봤습니다. <폼페이>도 곧 읽어봐야겠어요.

    1. 완전 절판은 아니구요. 20권 가운데 부분 절판이 있고, 20권짜리 전질 세트는 작년 봄에 절판되었답니다.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는 아직 절판되기에는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서두르심이 좋을 듯 싶습니다.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질 무렵에 책값이 가장 낮은 추세를 보이지만 낮은 가격은 곧 절판으로 직결되는 법이니까요.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은 본격적인 추리 소설로 접근하기 보다는 플랜타지넷 왕조 시기의 흥미로운 연대기로 읽으시는 편이 나을 듯 싶습니다. 단지 추리를 위해 읽기에는 김이 빠지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면 나무랄 부분이 없거든요. 추리 소설에서 재미를 느껴야 할 부분이 단지 ‘추리’ 뿐인 것은 아니지 않겠어요. 제 경우에는 범인이 누군지 너무 뻔해 보이는데 함정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주인공 때문에 걱정과 흥분으로 손을 땔 수 없었거든요.

      저 역시 20일이 되기 전에 어서 <<폼페이>>를 주문해 놓아야 할 터인데, 퍼언 연대기와 그레이브스의 ‘나 클라우디우스’를 동시에 읽고 있어서 영 여유가 나지를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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