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뒤렌마트의 <로물루스 대제>에는 닭 모이를 주는 일에 몰두하며 수많은 죄업을 토대로 번성한 로마를 역사에서 퇴장시키기로 한 황제가 등장한다. 물론 이 로물루스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던 시기에 고작 십 대 초반의 소년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부정하래야 할 수 없고, 또 이렇게 거창한 계획같은 것은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은 불문가지지만 그럼에도 천 년을 넘게 이어진 제국의 초라한 죽음에서 무언가 극적인 요소를 찾으려는 극작가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할 만하다. 그런데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를 언급하기에 앞서 뒤렌마트로 글머리를 여는 것일까? <로물루스 대제>와 이 소설에는 도대체 어떤 유사점이 있기에……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는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비견될 만한 소설이다. 이것이 소설임에도 말이다. ‘있음 직한 사실’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음에도 이것은 전혀 소설 같지 않다. 책등에 인쇄된 문구처럼 그는 그저 역사의 장막을 걷어올렸는지도 모른다. 비등한 또 다른 비유를 쓰자면 현대 한국 작가의 소설에 사마천의 『사기』에 버금가는 정치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경우랄까? 그러니 이 소설에 대한 칭찬은 이쯤에서 그만두어야겠다. 그 누구도 바보가 되고 싶지 않은 이상 클라우디우스에 관하여 쓰고 싶지 않게 만드는 이 소설 앞에서 호평을 나열하는 짓은 그런 바보들의 행렬에 동참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로마의 4번째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의 기구한 삶을 1인칭 화자로 다룬 이 소설은 20세기 전반부 로마사에 대한 논의의 거의 모든 관점을 수용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번진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호의적인 연구와- 다시 말해 제정으로의 이행이라는 엄청난 작업에 성공한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광적인 숭배- 한편으로는 원수정이라 불린 이 시스템이 실제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인척 관계에 있는 소수의 귀족 지배층의 협력에 의하여 운영되는 더욱 좁아진 과두정이라는 개념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과두정이 진짜 황제정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의 도상에서는 타키투스의 관점을 인용한다. 바로 공포와 피의 숙청이 만들어내는 권력의 독점화 과정이다.

 이 소설은 공화국의 이상을 지닌 마지막 로마인인 클라우디우스가 생존을 위해 바보가 되고, 결국 황제가 되었지만, 황제이기에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는 황제가 지닌 권력조차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권력자와 개인, 권력과 역사, 권력과 권력자, 제국과 종속민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생생한 실례를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달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만들어낸 독창적 결과물인 ‘황제(카이사르)’는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의 죽음에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어떤 종교보다도 단단하게 사람들의 의식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그래이브스는 클라우디우스라는 인물의 아이러니를 강조하고 있다. 그가 좋은 황제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정상화시키고자 노력했기에 공화정의 이상은 결정적으로 죽음을 맞이했고, 그가 네로라는 최악의 선택지를 통해 그 가문의 종말을 꾀하려고 했음에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의 가장 사악한 창조물인 ‘카이사르’는 계속되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뒤렌마트의 파라독시와 그레이브스의 패러독스가 겹친다. 역사 앞에서는 예외인 어느 개인도 없다!

 한편으로 이 소설은 헤로데 아그리파라는 개성적 인물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로마에 대항하려고 일어섰으나 제대로 서보지도 못하고 운명한 이 불운한 왕의 역설과 리비아와, 칼라큘라를 미혹시켰던 신성(神性:메시아)을 통해 그는 종교의 본질이 결국 사람이 믿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의 투사하는 고차원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이런 역할 이외에도 그레이브스가 또 다른 소설을 통해 플라비우스를 주인공 삼아 권력의 본질을 묘사하기 위한 장치로 삽입된 것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클라우디우스라는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본 권력의 암투와 인간의 본성은 소설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독서의 즐거움이다. 게다가 선량한 클라우디우스가 권력에 다가설수록 변모하는 과정은 너무나 섬세해서 종장에 이르기 전까지는 인식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늙은 통나무 왕’이 되어버린 한 남자의 방백이다. 이 소설은 많은 것을 담고 있지만 그 가운데 나를 가장 깊게 매료시킨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시라노에서 폴스타프를 거쳐 리어왕이 되어버린 한 절름발이 남자의 기구한 운명에 잠시 몰입을 한들 그것이 잘못이 될까? 사랑스럽지도, 당당하지도 않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한 남자에게 헌사로 받쳐진 이 소설에 열광한다 한들 그것이 무엇 그리 잘못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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