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ing Cross Rd 84

<채링크로스 84번가>는 영화의 제목이자 어느 서간문 간행집의 제목이다. 뉴욕과 런던의 고서점 사이에서 이어지는 편지를 소재로 한 이 영화가 얼마나 흥행했는지는 고작 내가 8살 무렵에 나온 영화이니 알 수 없지만 아주 가끔 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오는 가을 밤이면 편지를 쓰고 싶어지고 이어서 이 영화가 생각난다. 어쩌면 이것은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시기의 내가 편지 쓰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얼굴조차 모르는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마음속을 속속들이 아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것에 비해 또 얼마나 쉬운가?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채링 크로스 로드를 꽤 많이 걸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결국 84번가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과거의 흔적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고 보도에 새겨진 동판만이 외롭게 남아 있었다. 사실 오래전 런던을 묘사한 책들에 반드시 등장하는 채링 크로스의 헌책방 가운데 남은 것은 이제 두 개 밖에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둘 다 전통적인 헌책방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악보전문 서점이고, 다른 하나는 에로틱 소설과 예술(사진) 서적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 세실 코트의 헌책방들이 일부 남기는 했지만 채링크로스에 존재하는 가장 큰 서점은 역설적이게도 보더스가 되었다. 들리는 말로는 채링크로스의 보더스는 이 거리에서 가장 유서가 깊던 책방을 그대로 인수한 것이라고 하던데 나야 좋은 시절의 채링 크로스를 걸어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까닭 없이 채링크로스 84번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 2004년에 출간된 이 얇은 서간집을 읽는 묘령의 처자를 봤기 때문이다. 스물 남짓한 여자아이한테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 배급통제 아래 배고픈 영국인들의 불우한 처지와 현재를 비교할까? 아니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위트가 넘치는 한 여자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냉정하지만 다정다감한 한 중년 남자의 보이지 않는 웃음에 빠진 것일까? 묘령의 처자에게 까닭 없이 말을 건네 보고 싶었다. 책장을 넘기는 입가에 걸린 웃음이 시리도록 맑았다. 그 웃음을 보자마자 ‘혹시 다 읽으셨으면 저한테 빌려주시지 않을래요’ 라던지, ‘이 영화 보셨어요’ 같은 상투적인 문구로 열어보리라 마음먹었던 대화가 머릿속에서 하얗게 사라졌다. 묻고 싶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음에도 때로는 방해해서는 안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스물일곱인 내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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