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킨의 춘향, 에이프만의 뮤자게트

독설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일은 쉽지 않다. 독설이 예의에 벗어난 과격한 행동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이전에 타인에 대한 비난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상대를 찌름과 동시에 나 역시 무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설을 퍼부어야 할 순간이 있으니 바로 함부로 기사를 쓰는 후안무치한 작태이다.

최근 발레계의 가장 큰 이슈는 보그에 게재된 김주원의 사진이었다. 나이 지긋한 노신사의 훈계조의 칼럼도 읽었고, 지극히 도식적인 논리 구조에 따라 몸이 상품이 된 시대라는 개탄의 목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나라면 그런 글을 쓰기 이전에 최소한 사실 확인 정도는 했을 것 같다. 김주원이 무엇이 아쉬워서 몸으로 유명세를 얻어야 하며, 까닭 없이 보수적이기만 한 발레계에서 주홍글씨를 받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누드- 인지도 및 포지션 향상 – 몸의 상품화로 이어지는 해석이 꽤 정확하게 핵심을 집어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모든 경우를 설명할 수 있는 최적의 구조는 아니다. 차라리 나라면 ‘몸’의 역동성을 겨우 그 정도 밖에 해석해 내지 못한 자칭 전문사진작가들이 망쳐놓은 좋은 기회에 관해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다음은 불성실한 기자의 한심한 작태이다. 어느 일간지에 실린 이 공연의 논평은 정말이지 두 번째 인터미션에서 재빠르게 자리를 뜬 채로 대충 기사를 작성했음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기사의 초점은 <포킨의 춘향>을 통해 한국 발레 역시 세계에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방향으로 논지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논조는 공연을 단 한 순간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포킨의 춘향은 너무나 낡은 스타일의 안무라 무대와 의상에 대단히 공을 들였음에도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없다. 본격적인 현대 발레로 재편하려고 투입해야 할 자원과 노력은 예측하기조차 힘들 정도이고 설령 그것에 성공하더라도 이 발레는 결코 한국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저 한국적인 옷을 빈에서 벌어진 어느 코미디에 덧씌워놓은 것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 공연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에이프만의 뮤자게트> 였다. 인터미션에서 재빠르게 얼굴이 꽤 알려진 발레리나의 코멘트를 따낸 다음 콧노래를 부르며 조기 퇴근을 즐겼을 그 기자의 모습을 생각하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종을 잡을 수가 없다.

어찌 되었건 첫 번째 공연인 <레 실피드>는 상쾌한 바람 대신 춘곤증을 유발하는 졸린 바람이 부는 다듬어지지 않은 고전 발레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고, <포킨의 춘향(사랑의 시련)>에서는 소재가 지닌 반복의 지루함을 덜고자 도입한 새로운 배경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언가 새롭거나 탁월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듯이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무용수들의 가능성을 낡은 안무에 가두어둔 속박이 매 순간순간 느껴졌다는 것 이외에 여기에 관하여 더 남길 말은 없다.

하지만 <에이프만의 뮤자게트>의 경우에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좋은 공연이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을 것 같다. 바흐의 바이올린 콘체르토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이 이토록 발레와 잘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전에는 알지 못했었다. 업라이트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뭉텅한 소리와 콘체르토를 끌고나가기에는 3% 부족한 제1 바이올린만 제외하면 연주도 훌륭했고, 김형웅의 신들린 듯한 춤사위 역시 아름다웠다. 조명과 암전이 조화를 이룬 무대와 진중하면서도 빠른 움직임, 현대 발레가 보여주는 아카데믹한 모든 동작들을 완벽한 호흡으로 맞추어내는 솜씨에 감탄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감탄해야 할까?

두 해전 우연히 <뮤자게트>의 공연 클립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공연이 그리 나쁘지 않은 공연이었음에도 국립발레단의 솜씨는 기립 박수조차 모자랄 호연이었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춤사위의 흐름을 보고 있노라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잔 실수 하나 없이 아귀가 착착 맞아떨어진다고 해야할까? -여기에서 피날레의 군무가 지니는 논리적 불완전성과 전형성은 에이프만의 현기증으로 의제로 해 두자!- 그동안 국립발레단의 정기공연은 클래식 발레에 머물러 있었고, 최근에서야 러시안 모던 발레로 영역을 확장했는데 이제는 현대 발레 역시 정기공연에서 보게 될 날이 머지않았나 싶다.

P.S.
그렇다면, 근래들어 자주 공연되기 시작한 해외 무용단들의 내한 공연이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것은 순전히 기회비용을 심각하게 따지는 미친 내 사고의 탓이다.

포킨의 안무는 키로브 이전 마린스키 발레의 원형을 느끼기에 딱이다. <레 실피드>의 경우 <불새>보다 더 유명한 작품이지만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불새>가 더 볼만하다.

VIP석에는 근래 들어 회사 협찬으로 나누어진 초대권을 들고오는 넥타이 부대들의 출현이 잦다. 남자들 셋만 모이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이 제멋대로 군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나 역시 이 범주에 속하지만- 게다가 이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발 ‘브라보’는 한 번만 하자. 괴성으로 이어지는 ‘브라보’를 삽 십 초 간격으로 계속 듣는 것은 누구에게나 심적으로 괴로운 일이다. 대신에 공짜 초대권으로 꽃다발을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매 공연 빈손으로 무대 인사를 하는 발레리나를 보는 것은 이제 지겹다.

2 thoughts on “포킨의 춘향, 에이프만의 뮤자게트”

  1. 어제 한겨레에 리뷰 기사 났던데, 거기서도 ‘긴 공연 시간 동안 두 번의 인터미션을 참지 못하고 <뮤자게트>를 보지 못한채 뛰쳐나가버린 관객’이 있지 않을까 염려하더군요. 그런데 정말 그런 관객이 있었군요 ㅎㅎ

    1. 사실 제 주변에서도 몇명 보였거든요. 바흐의 음악에 맞게 대위법처럼 도식적이긴 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명쾌하게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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