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냥꾼

 만약 내가 영어권 국가에 태어났더라면 나 역시 수택본과 현대 초판본에 목을 맨 책사냥꾼이 되었을 것이다. 저자 서명본을 찾아 헌책방 거리를 헤매고, 전집에서 망실한 책들을 채워넣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장서표를 위해서라면 전위적인 예술가들의 술친구가 되는 일도 마다지 않았을 것이리라. 움베르토 에코가 화려한 명성에도 폴리오에 대한 욕심을 은연중에 들어낸 것처럼, 나 역시 폴리오와 켐스콧판 장서를 거저 줍는 기회를 얻기를 평생동안 꿈꾸지 않았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가 태어난 이 나라는 책에 관한 한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책은 일종의 성물이지만 책 자체보다는 내용에 신성을 부여하는 쪽이 더 많다. 따라서 판형이나 누가 이 책을 가졌었느냐가 책에 신성을 더하거나 감할 그 사유가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책값의 저렴함은 능히 학생의 궁한 용돈에도 번듯한 서가를 꾸밀 정도다. 정확한 추산은 아니겠지만 담배 하나만 끊어도 널찍한 방을 책으로 가득 채우는 일이 어렵지 않으리라. 술자리를 조금만 줄여도, 테이크 아웃 커피 대신에 보온병을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 누구나  탐낼만한 서재를 만드는 지출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다. 그러니 책사냥꾼이 되고자 애써 전 세계를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책사냥꾼』은 저자가 호주라는 문화의 변방에서 태어나 영국과 미국을 거쳐 파리에 정착하게 되는 여정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여정의 시작점이 되는 것은 책에 대한 사랑이다. SF로 시작된 열정은 그래이험 그린이라는 걸출한 작가 (그는 냉전 시대에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공산권에 알려졌다.)를 통해 본격적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이렇게 불타오른 열정은 이내 열정 자체를 연료 삼아 타오르기 시작했다. 레베스테의 『뒤마클럽』에 등장하는 코르소만큼 멋진 책사냥꾼은 아니지만 -사실 그는 좀 어수룩한 잉글로색슨계의 표정을 보여준다. 마치 실적이 변변치 못한 외판원 같다고 해야 할까? – 그가 보여주는 책사냥꾼으로서의 삶은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비블리오 애호가의 연대기로써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그의 경험은 꾸밈이 없고, 독자가 지니는 작가에 대한 경이가 녹아 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줄만 하다.

 하지만, 진짜 이 책의 백미는 후반부에 수록된 잘 정리된 독서 목록이다. 타임즈 선정 100선과 다르게 이 목록은 먹물이 아니라 책을 사랑하는 아마추어의 관점에서 등재된 것이기에 오히려 신뢰가 간다. 그가 작성한 목록은 전문가로서 지니게 되는 비평안 대신에 재미와 감동, 입소문을 기준으로 선정되어 있기에 다른 목록이 지니지 못한 생기발랄함을 지니고 있다. 무작정 따라 읽기에는 괴리가 있겠지만 장차 영미권 현대 문학에 발을 담글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는 어느 목록보다 좋은 참고 자료가 될듯싶다. 무엇보다 피 선생님의 ‘오! 수.’에 감동해서 그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화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2 thoughts on “책사냥꾼”

  1. 찬익 님 추천으로 저도 얼마전에 구입했어요. 왠지 <오픈 북>보다 더 깊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어서요. 책에 대한 전문가라기보다는 팬인 입장에서는, 역시 같은 팬의 입장에서 책에 대해 쓰인 책이 더 공감대를 이끌어내겠죠? 부러움도 동반된 공감대요.

    우리나라는 책 자체보다 내용에 신성을 부여한다는 말에는 동감할 수밖에 없네요. 그리고 저도 외국책을 가끔 구입하는데, 확실히 우리나라는 책값이 전반적으로 싼 편인것 같아요. 요즘에 값이 많이 올랐다가 투덜대는 글을 자주 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른 나라에 비하면 싼 것 같네요. 미국같은 경우 정말 읽고 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페이퍼백의 가격이 우리나라의 질좋은 종이로 만들어진 웬만한 소설 한 권 값과 맞먹으니까요.

    1. 전 팬의 입장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그 기괴한 행태에 반해버렸어요. 마지막에 파리에 가서 조이스와 베게트가 오갔던 계단과 아파트를 이야기할 무렵에는 당장 또 다시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싶기도 했구요. 저자 서명을 얻기 위해, 혹은 드래프트를 얻기 위해 어수룩하게 다닐 저자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자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교과서를 학기 시작에 샀다가 학기 말에 되팔아야만 하는 가격을 유지하는 외국보다 확실히 저렴하죠. 미색모조가 기본 종이로 쓰이고, 아트지로 인쇄된 도판도 1~2만원에 주을 수 있기도 하고요. 전 아주 어쩔 수 없는 경우만 페이벅백을 읽는데 손끝에서 느껴지는 촉감과 숨이 막힐 듯한 지류의 냄새 때문에 가능하면 하드커버로 사자는 주의예요. 읽는 책 가운데 어떤 것들은 아예 페이퍼백으로는 나오지도 않는 책들도 꽤 되구요. 하드커버를 사는 것은 당신이 부자라고,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이 지닌 품격을 사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차라리 다른 곳에 아끼는 편이 낫더라구요.

      번역이 정말 문장 하나 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슴 속에서 분노를 자아내게 만들 정도가 아니라면 페이퍼백과 번역본가운데 시간 면에서나, 비용 면에서나 우리나라 책이 더 좋은 선택이라는데 동감이예요. 참 전 어제서야 열세 번째 이야기를 다 읽었답니다. 원서로 읽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소설이었어요. 문장 하나 하나가 훔쳐 쓰고 싶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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