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冊 or 責)

18세기 산문집을 읽다 보면 유난히 책에 관한 언급이 많은데 특이한 부분은 그들이 책을 얻게 되는 경위다. 오늘날의 지적권 개념으로는 확실히 불법이지만 그들은 귀중한 책을 필사함으로써 자신의 서가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아마 당시의 글쟁이라면 인세를 받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현대의 전업 작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매설가나 하는 일이라고 고개를 돌렸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자신이 지은 책을 필사하느라 바쁜 사람들을 보며 득의만만한 웃음으로 인세를 대신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더욱이 한자 한자 세필을 들고 승두세자로 밤을 새워 필사를 하는 동안 만들어지는 것은 비단 책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용에 대한 이해와 비판 역시 ‘그 와중에 슬금슬금 생겨나지 않았을까?’ 하고 잠시 상상해 본다.

물론 오늘날 18세기 방법을 답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질 세대에 태어난 우리가 무슨 인내심으로 한자 한자를 정성껏 필사하고 설령 그럴 인내심이 있다 하더라도 복사기보다 우리가 더 정확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둠의 경로를 통해 서적 우편보다 빠르게 신간을 구할 수 있는 이즈음와서는 책의 소유라는 개념 자체의 재정의가 필요하기도 하다.

과거의 책은 필사본이든 인쇄본이든 간에 꽤 비싼 가격을 자랑했다. 리사 자딘의 『worldly goods』에 의하면 상업 혁명 이전에 백 권 규모의 장서를 구매하려면 중산층의 경우 년 수입의 1/4을 거의 평생에 걸쳐 지출해야만 했다고 한다. -저자에게 인쇄된 자신의 책을 주는 전통은 책이 그토록 비쌌기에 증정된 책 자체가 인세로써 충분히 기능 할 수 있었기 때문 확립되었다- 그렇기에 책은 신분의 상징이 되었고, 문자 해독력이 극도로 열악하던 시기에 치자와 피치자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선이 되었다. 그 후 인쇄 프레스의 기술적 발전은 점차 서적 생산 단가를 낮추어 왔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여전히 책을 소유하는 일이 -적어도 전 지구적 기준으로는-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습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출판부와 옥스퍼드 출판부의 공인된 초판 인쇄 부수는 1,200부이다.- 책의 카테고리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세계의 영어권 독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놀랄 만큼 적은 부수이다. 페이퍼백의 범람에도 평범한 노동계층이 텔레비전 구매에 소비하는 생애지출보다 도서구입비가 적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문제다.

해마다 정월이 되면, 그리고 독서의 계절로 명명된 가을이 되면 서점과 책에 대한 특집 기사들이 쏟아지곤 한다. 비싼 책값과 왜 한국에는 페이퍼백이 없느냐는 불평. 대중교통에서 읽기에는 너무무겁다는 불만과 원하지 않는 하드 커버 덕분에 생긴 거품이 싫다는 이야기까지 그 불만은 참으로 다채롭다. 여기에 책은 내용을 읽는 것이지 책이라는 물건을 소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주장까지 겹치면 책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일주일이 모자랄 지경이다. 그러니 먹물과 교양은 별개라는 논쟁은 논외로 두자. 그리고 한 번쯤은 나 역시 책에 대한 내 편견을 한 아름 늘어놓고 싶었다.

내가 과도하게 건장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은 신국판으로 제단된 하드커버쯤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채 돌아다닐 수 있고, 전공 서적 정도는 어디에서든 가벼운 마음으로 팔뚝에 얹고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때다. 신국판에 이어 더욱 작고 가벼운 책이 오늘날의 출판 경향이라지만 난 아직도 묵직한 단위 중량을 자랑하는 미색 모조를 사랑하고, 도피지에 화려하게 인쇄된 표지를 즐긴다. 하드커버가 입혀진 사철제본을 좋아하는 것은 보관의 용이함 이전에 손에 잡히는 묵직한 느낌이 좋아서이다. 기실 사철제본이 필요할 정도로 책을 험하게 다루지도 않고, 서표가 필요할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지 않지만 말이다.

사실 스무 살을 넘은 뒤로는 책값에 대한 신경도 끊은 것 같다. 책값의 상승률은 지난 20년 동안 고작 +170% 내외였다. 같은 기간에 버스요금이 +2,000% 이상 인상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경이적이다. 게다가 헌책은 그 상승률이 더욱 미미해서 고작 +150% 내외이다. 경제적 풍요가 십 년을 기점으로 배수로 커지는 세대에 속한 나로서는 책값에 예민해지는 것이 곧 심력의 낭비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십 대의 내 구매력으로는 한 권 한 권을 신중에 신중을 기해 사들여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그 시절의 내 시간 가치는 책값에 한참 못 미쳐서 서점에서 서서 읽는 책들이 사들이는 책들의 몇 배수였다. 하지만, 요즘의 책은 향상된 구매력에 비하면 너무나 가벼운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에 예전과 다르게 종이 두름을 사들이는 일에 인색하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사기 전에 한참을 망설이는 가격대의 책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일 년에 고작 한두 권이니 그리 신경 쓸 일은 못된다.

8.5포인트로 시작한 내 독서 인생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내가 가장 선호하는 크기의 활자는 9포인트이다. 내 서가에는 5만 부가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와 고작 500부도 팔리지 않았을 책들이 나란히 놓여 있고, 가끔 페이지 불리기에 당하는 책이 있으면, 필름값도 회수하지 못할 만큼 인기가 없지만 나에게는 사랑스럽기만 한 책들을 거저 줍기도 한다. 게다가 난 램지의 법칙이 책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원래 사는 사람이 적은데다가 사지 않고서는 못 배길 그런 책이 더 비싼 법이지만, 때로는 자긍심 하나 때문에 독자에게 부담을 전가시키기 보다는 베스트셀러의 수익으로 손실을 보전하는 출판사들도 많다. 그렇기에 첩첩이 서가에 쌓인 다양한 성격의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분책과 페이지 늘리기, 비싼 제본마저도 귀여운 투정쯤으로 보일 때가 잦은 것은 아닐까?

난 흡연을 즐기지도 않고, 애주가지만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으며, 차를 너무 좋아해서 항상 보온병에 그날 마실 ‘오늘의 차’를 준비해 다닌다. -그럴 여유가 되지 않는 아침이면 티백이라도 챙겨다닌다- 게다가 나에게는 시간과 애정을 요구하는 하는 어떤 이도 없다. 그렇기에 내게는 꼭 해야 할 일 이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몰두할 충분한 여유가 있다. 기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휴가는 삼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시골집으로 내려가 책이 내뿜는 그 묘한 향기에 취해 보내는 멍한 시간이다. 또 지금껏 내가 살아온 공기는 책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지는 않아도 정서적으로 책을 아끼는 사람들이 내뿜는 향기로 채워져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공산이 크다.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세파에 찌든 고단한 삶만큼이나 책은 나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대화의 소재이다. 책이 없다면 그 공백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아무리 ‘démoncratisation’ 이 시대적 화두가 된 이 시대라지만 겸손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굴종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역설적이게도 이 시대의 리바이어던은 참주정 시대의 리바이어던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어느 시기보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자유로운 세상이라는 슬로건 이면에서는 ‘문혁’ 못지않은 ‘모난 돌 때리기’가 존재한다. ‘마녀 사냥’의 시대는 인류 역사에서 결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도편 추방에서 간통 혐의로, 이단과 마녀에서 이설로 끊임없이 그 명칭은 바뀌었지만 그것들은 다만 마녀의 정의가 시대에 따라 달라진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물론 아직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움츠러든 목은 펴질 줄 모른다.

빛이 오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한 번 더 이토록 캄캄한 어둠 속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후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De Arte Dubitan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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