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의 여인들

지금 생각해 보면 용맹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17살 무렵 내가 가장 좋아하던 비극의 주인공은 안드로마케였고 이를사람들에게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프랑스 비극 좀 읽었다고 자부하는 이들로서는 그 유명한 연극을 떠올리며 17세기 연극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라고 생각할 법도 하건만 애석하게도 당시 내 주변에 에우리피데스는 고사하고 라신을 읽은 사람도 없었던 암흑의 시기였으니 만큼 사람들에게 안드로마케는 안드로메다 성운의 자매쯤으로 여겨졌을 것이 분명하다.

어찌 되었건 『트로이의 여인들』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중에 꽤 알려진 작품 가운데 하나다.  <전쟁 3부작>의 마지막 이야기로 규정되지만 사실 이 세 편의 희극 사이에는 <복수 3부작>과 다르게 이야기의 연속성이 없다. 오히려 『트로이의 여인들』은 훨씬 이전에 출품된 『안드로마케』와 더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두 연극 모두 일리아드의 후일담을 다루고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인생 역경이 하나의 이야기처럼 매끄럽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연극은 같으면서도 조금 다르다. 『트로이의 여인들』이 전쟁이란 외부성으로 말미암아 한 가정이 어떻게 파괴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면 『안드로마케』에서는 가정 갈등으로 말미암아 한 가정- 보다 정확하게는 한 여성이- 어떻게 파괴될 뻔했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극을 비평하기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항상 제기되는 문제지만 희극의 텍스트를 읽는 것과 연극을 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똑같은 대사라도 연출가의 의지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캐릭터 간의 비중 분배도, 극을 이끌어 가는 힘도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범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머릿속에 떠올릴 공통분모라는 것이 존재한다. 결국, 고전의 경우 이 공통분모에 충실할수록 원전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여기서 멀어질수록 실험 정신이 투철하다는 평판을 얻게 되는 셈이다.

사실 내가 본 『트로이의 여인들』의 연출은 파격적일 정도로 인물 간의 균형이 깨져 있었고 기존의 해석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대부분의 해석에서 카산드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 목소리를 내지만 아무도 그것을 듣지 못하는 진공의 벽에 둘러싸인 인물로 그려진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녀의 정신은 신과 운명의 희롱 앞에서 처참하게 부서져 있으며,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알고 있기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연약한 처녀이자 한편으로는 다가올 미래를 알고 있기에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기뻐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반면 안드로마케는 남편에 이어 아이까지 잃고, 가장 증오 해야 할 적의 아내가 되는 운명을 지닌 여성으로서 전쟁으로 파괴된 가정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헤카베는 트로이의 여왕이자 최후의 생존자로서 국가의 소멸과 폭력의 재생산이라는 메커니즘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주체다. 결국, 보통의 연출에서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이야기의 주재자는 헤카베가 되며, 안드로마케의 여성성은 비극을 심화시키는 중요 도구다.

하지만, 이 연출에서의 중심인물은 헤카베가 아니라 카산드라다. 그녀의 선이 굵은 연기는 신들의 장난에 가장 처참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순수한 처녀가 아니라 지독한 광기를 품은 처벌자로써 그려진다. 헤카베는 마지막 남은 자식인 카산드라의 변화와 손자의 허무한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안드로마케는 그저 원작이 있기에 등장하는 수준으로 전락한다(그녀의 격렬한 몸짓으로 표현되는 고뇌는 솔직히 아무런 공감도 자아내지 못했다)

아니 애둘러 말하는 것은 이제 멈추어야겠다. 이 연극은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위안부 문제를 조금 언급하고 있기는 하나 본질적으로 전쟁에서 무고한 희생자 역할을 도맡는 것은 가장 연약한 여성과 어린아이라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지는 못하다. 기본적으로 배우들의 대사는 원전에 기초하며 나레이션 역시 원전에 충실한 편인데도 그리스 비극의 특징인 등장인물의 운명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강렬한 동화 현상이 없었고, 배우들의 연기를 선이 굵고 움직임이 컸으나 단지 그것뿐이었다. 연극은 시각적 효과를  통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들을 진정으로 아프게 만드는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찰하기 보다는 절규 자체를 보여주는 데 치중하고 있었다.

물론 나레이션을 창으로 처리한다든지, 격렬한 안무를 통해 신 내림를 표현함과 동시에 강간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는 점이나 인물의 내적 고뇌를 형상화 시켰다는 점에서는 약간 점수를 줄 수도 있으나 뭐 그 정도야 요즘 세상에 흔해 빠진 것이 아닌가? 표정이 없는 배우는 그저 대사를 읊는 마리오네트에 지나지 않는다. 연출의 지시에서 벗어난 배우 개인의 캐릭터 해석이 있었더라면 한층 나은 극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연극에서 배우는 그저 연출의 의도를 문자 그대로 충실하게 투사하는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P.S.연휴동안 본가에 내려갔다가 트로이의 여인들을 다시 읽는 동안 처음 시작 장면과 카산드라와 관련된 부분을 다른 희극과 헷갈려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내 기억이 그리 온전한 편은 아니라는 반면 교사로 삼아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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