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이야기

『폭풍의 언덕』에 열광했던 이라면, 기묘하고도 조금은 수상쩍은 영국식 미스터리를 매혹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라면 『열세 번째 이야기』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수작이다. 그리고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반드시 원서로 읽기를 추천하는 책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시간 관계상 역서로 읽을 수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인칭이 변화하는 순간 모든 의혹이 풀리는 그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문제의 장면에서 내가 느낀 것은 고작 어떤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검토할 찰나에 역자는 조금 싱거운 방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소설은 문체의 변화를 통해서 극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미스터리를 벗겨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반칙이 꽤 신경을 거슬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실 소설에 삶의 일정 시간을 헌납한 독자에게 오역이 짜증스러울망정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역과 난삽한 문장 정도는 그간의 경험으로 알아서 교정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역보다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역자가 편집자처럼 작가와 독자 사이의 대화를 교란하는 경우이다. 인물 간의 관계에서 역자는 마치 독자에게 판단 능력이 없는 것처럼 멋대로 표현을 완화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인물의 행동 동기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거기에 행동 동기에서 비롯된 결과물의 정체성 역시 역자의 건방진 월권행위로 말미암아 빛을 잃었다.

번역은 그저 한 언어에 대한 전문성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작가의 의도를 최대한 살려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주임무로 삼아야 한다. 작은 표현 하나가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고, 어법 전환이 몇십 페이지의 상황 전개보다 더 웅변적인 경우도 많다. 물론, 역자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조금 더 심사숙고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번역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이 소설이 지닌 진짜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기 어렵다. 그리고 주인공이 받은 첫 번째 편지에서 언급된 문제에서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왜 그리 힘들었는지 외면하게 된다. 진짜 중요한 결말을 잃은 대신 서툰 트릭 하나만을 풀면서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되는 최악의 비극과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비단 독자의 탓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비다 윈터가 비다 윈터 일 수밖에 없는지, 그녀가 불구의 손으로 원고를 써내려가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는지를, ‘진실을 말해 달라는’ 그 소년 같은 사내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이 그토록 힘들었는지에 감동했다면 번지수를 제대로 찾은 셈이다. 주인공이 잃어버린 형제인 모이라와 화해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면 살아남은 자가 느끼는 공허감과 자책의 무게 역시 알고 있으리라.

사실 이 책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책이 되긴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읽어볼 가치가 있는 멋진 소설이다.

2 thoughts on “열세 번째 이야기”

  1. 책을 읽기 전에는 이 글이 참 알쏭달쏭하다고 생각했는데, 읽고 나니 이해가 되네요. 기회가 된다면, 몇 년 지나 번역본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때쯤 원서로 접해보려 합니다. 🙂

    1. 역자에 대한 비방은 즐기지 않는 편인데 이 소설은 원서로 직접 읽지 않은 것이 너무 아쉬웠어요. 원서로 읽었다면 얼마나 짜릿하고 재미있었을까 느끼는 순간 역자를 비난할 생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라고요.

      리뷰를 쓰면서 사소한 단어 한 두개로도 충분히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알쏭달쏭하게 쓸 수 밖에 없더라구요. 이런 기막힌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I”가 등장하는 순간의 전율을, 수수께끼의 해답이 그려내는 애잔함을 리뷰에 전부 써버리면 벌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사실 먼 훗날 꼭 한번 드라마로 옮겨진 소설을 꼭 보고싶은 책이예요. 사라 워터스의 경우로 볼 때 5년 정도만 기다리면 될 것 같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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