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잘 쓰인 소설이 항상 재미난 법은 없는 모양이다. 사라진 도시를 섬세하게 눈앞에 그려내는 필치. 실제와 상상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세부 묘사. 한편으로는 전형적이지만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되려 애정을 쏟게 되는 인물들. 빠른 템포와 나무랄데 없는 사건 전개. 분명한 의도. 숭고함을 돋보이게 하는 욕망. 사실, 이 정도면 소설이 재미없게 느껴질 이유는 없다 해도 무방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하지만, 대가의 반열에 오르기까지는 좀 두고 봐야겠지만 히스토리 팩션에서는 수준급의 작가로 불리는 사람의 소설로는 그래도 무언가가 부족한 느낌이다. 딱 집어서 비판할 여지는 없지만 교과서처럼 잘 쓰인 모범 답안을 읽는 기분이라 어딘가 재미가 덜하다고 해야 할까? 100% 실력을 발휘하는 대신 가벼운 마음으로 80% 정도만 연습 삼아 써본 습작의 느낌이다. 아무래도 이 소설은 『당신들의 조국』, 『이니그마』, 『아크엔젤』로 대표되는 히스토리 팩션의 새장을 연 작가가 키케로 트릴로지로 불릴 고대 로마의 히스토리 팩션을 쓰고자 연습삼아 쓴 습작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여기에서 얻은 자신감을 토대로 본격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던지.

그렇지 않다면야 폼페이를 살아가고 있던 인물들에게 이리 흐릿한 색채를 입힌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충분히 다채로운 성격의 인물을 창조해낼 수 있는 작가가 그려낸 인물은 입체적이라기보다는 모자이크 속의 인물화처럼 또렷한 형체를 가지고 있긴 해도 색채만큼은 흐릿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인물들이 지닌 색채는 수도관이 지닌 이미지보다 못하다.

근래들어 지하철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책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로버트 해리스의 다른 역작에 비하자면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거장에 의해 영상으로 옮겨져 올 한 해를 소란스럽게 만들 것임이 분명한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3 thoughts on “폼페이”

  1. 로버트 해리스의 작품으로는 가장 처음 읽은 거라 저는 정말 재밌게 읽히더라고요^^; 전형적인 면에 대해서는 저도 동감입니다. 첫 장의 코렐리아와 아틸리우스의 만남을 암시하는 부분에서 둘이 뭔가 있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둘이 그렇게 되더라고요. 별다른 고민없이 재미있게 독서를 할 수 있었다는 거에서는 만족스러웠지만 캐릭터 하나하나는 정의로운 젊은이, 졸부, 졸부딸인데 착한 아가씨, 딱 거기까지의 인물들이었던 것 같아요. 히스토리팩션만 읽으면 되는 저는 기대를 갖고 다음 책을 읽어도 되겠네요^^ 작년 하반기에 호러소설을 쓰셨다는데 그 책이 번역돼서 나온다면 어떤 이야기일지 기대됩니다.

    1. 아마 그 소설 제목이 <>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전임 영국수상의 대필작가(ghost writer)가 수상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리뷰로 접했거든요. 재작년에 유럽을 여행하다가 저자로부터 사인을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다른 작가보다 한층 기대 수준이 높아진 것 같아요.

      히스토리 팩션 삼부작만 남으셨다면 기대하셔도 좋으실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아직 <<아크 앤젤>>은 리뷰만 잔뜩 읽었지 실제로 소설은 읽지 못해서 아주 자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당신들의 조국>>만큼 잘되었다는 평가가 우세하거든요. 그리고 <<이니그마>>의 경우는 꼭 영화도 함께 보시기를 권해드려요.

      랜덤하우스에서 키케로 트릴로지까지 번역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긴 한데 어찌될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작년에 출간된 <>까지만 간행되고 말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2. 로마 제국의 수도 기술관 아틸리우스는 실종된 엑솜니우스를 대신하여 미세눔의 아쿠아리우스로 파견된다. 폼페이의 노예출신 귀족 암플리아투스는 자신의 거대양식장에서 비싼 물고기들이..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