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그마 (Enigma)

냉전이 조금만 더 늦게 끝났더라면, 정확하게는 스파이물의 전성시대가 조금 더 오랜 시간 지속하었다면 미래 직업에 대한 내 몽상에는 암호해독가라는 직업이 하나쯤 추가되었을지도 모른다. 스파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아니지만 언제나 빠질 수 없는 역할. 그가 없다면 주인공은 그저 몸으로 뛰어다니는 흥신소 직원이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나를 유쾌하게 만들었던가? 거만한 표정으로 주인공이 듣기에는 너무나 진부하지만 나로서는 고혹적이기만 한 이야기를 한참이나 읊어대다가 ‘아! 그것 말이세’하며 간단하게 해독한 암호문을 건네는 캐릭터들은 때로는 전형적이지만 주인공이 감내해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점에서 항상 나를 즐겁게 만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하지만, 스파이 소설 속에 묘사된 그들의 모습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공개된 암호해독가들의 모습은 박식한 노년의 학자라기보다는 초조함에 쫓기는 창백한 안색을 지닌 체크무늬 자켓 차림의 사내들이다. 그리고 이런 그들이 치른 그들만의 전쟁을 새로운 시각으로 되살린 것이 바로 로버트 해리스의 『이니그마』다.

원스턴 처칠은 대서양 전쟁을 그 의미가 그래프로만 보여지는 가장 중대하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 전쟁이라고 묘사했다. 평시 영국 경제가 필요 5500만 톤의 수입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해상 운송 전쟁. 전시체계에서 4400만 톤의 수입물량을 맞추기 위한 노력과 이를 좌절시키기 위해 전개된 독일 잠수정과의 전쟁이 역사에 기록된 대서양 전쟁이다. 『이니그마』에서는 이 대서양 전쟁의 한 복판에 블레칠리 파크로 불리는 통신부호암호학교의 샌님들을 등장시킨다. 상선단을 U보트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독일측 이니그마를 해독해야 하는 일단의 옥스브리지 출신에 수학자들이 사건의 중심에 놓여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독일 측 U-보트를 막기 위한 전개와 함께 사라진 수수께끼의 연인을 찾는 어느 암호해독가의 이야기가 같은 축선에서 동시에 전개된다.

사실 이 소설 역시 원작보다 영화를 먼저 본 경우에 속한다. 2003년의 어느 아침 케이블채널을 돌리다가 케이트 윈슬릿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보기 시작한 이 영화가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이야기의 중반이 넘어서였다. 주인공 제리코의 사라진 옛 연인인 클레어 역을 맡은 새프런 버로우즈의 아름다움에 둥근 안경테를 낀 헤스터 역할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던 케이트 윈슬릿의 연기가 다소나마 빛이 바랬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케이블채널에서 아주 가끔 만날 수 있는 보석 같은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아니 복잡한 이니그마의 시스템과 해독 과정을 설명하는 일 없이 시각적 묘사만으로 관객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숨겨진 대서양 전쟁의 일면을 이끌어 냈다는 점은 영화나 소설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엔딩은 소설과 영화가 조금 다르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의 마무리에 비해 영화의 마무리가 촌스럽긴 해도 한결 사랑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 소설은(영화는) 총탄이 난무하는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 전선과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 벌어지는 전선만큼 중요한 또 다른 전쟁을 다룬 이야기다. 이들이 치른 전쟁 역시 잠 못 드는 밤과 지켜야 하지만 지키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로 점철된 기나긴 여정이다. 등화관제로 어둠에 휩싸인 도시와 안개 낀 풍광을 뒤로하고 전시배급제 아래에서 헐벗은 채 싸웠던 이들의 무훈은 오랫동안 다양한 정치적, 군사적 이유로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암묵적으로 두 가지 위선을 비웃고 있다. 하나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스탈린을 두려워하는 처칠이 내린 결정이고 다른 하나는 제2차세계대전에 대한 미국중심적인 혹은 야전 중심적인 시각이다. 루즈벨트가 처칠과 함께 독일 우선 원칙에 동의했지만 펜타곤의 장군들이 유럽보다 태평양 전쟁에 주력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아울러 1943년은 유럽의 전쟁 주도권을 영국이 미국에게 넘긴 시기와 일치한다. 많은 희생을 치렀으면서도 들러리가 되어버린 상황에 대한 표현하지 못할 불쾌함. 먼 훗날의 관점으로 보자면 유럽 전쟁에서 수행한 미군의 역할은 과대평가 되었고, 전쟁의 실질적인 승패는 이미 야전이 아닌 전략물자와 후방 전쟁에서 이미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항상 전쟁의 극적인 순간만을 묘사하는 펜과 영상에 대한 조소다.

하지만, 이보다 한층 심각한 블랙 유머는 1943년 시점에서 처칠이 스탈린의 유럽의 제2전선을 열어달라는 요구 때문에 상당히 곤혹스런 처지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이 기초한다. 소설에서 묘사된 사라진 비밀 메세지 역시 이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전쟁 후 스탈린에 굴복한 처칠이 폴란드 문제나, 공산권에서 탈출한 USSR 병사들의 송환 문제에서 얼마나 무력한 모습을 보였는지 소설은 직접적으로 거론하고 있지는 않지만 영국식 블랙 유머로 그 역설적인 상황을 풍자하고 있는 셈이다.

4 thoughts on “이니그마 (Enigma)”

  1. 안녕하세요?
    인터넷으로 콜린 맥컬로우의 로마의 일인자 검색하다 여기까지 흘러왔는데요 블로그 구경 잘 하고 갑니다.
    다만 두 가지 실수하신 게 있어서 알려드리려고요.
    하나는 트로이의 노래를 로마의 일인자 쓰기 전에 연습으로 쓴 거 같다고 쓰셨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고요 지금까지 7권 나온 맥컬로우의 로마 역사소설 가운데 5권인 체자르(Caesar)를 끝내고 6권인 10월의 말(October Horse) 쓰기 앞서 쓴 작품입니다.
    둘은 로마의 일인자에서 체자르의 부모를 이어주는 따스한 중매쟁이 원로원 의원 루푸스가 나중에 술라가 군대 편성하는 데서 죽는다고 알고 계신데 술라 군대 손에 죽는 루푸스는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이고 아우렐리아의 외삼촌인 이 루푸스는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로 시리즈 셋째 작품인 포르투나의 총애를 받은 이들(Fortune’s Favourites) 거의 끝부분까지 장수한 뒤 자연사합니다.
    그럼 이만.

    1. 안녕하세요.

      Song of Troy가 출간되던 1998년 이후 나온 인터뷰 기사에서 로마의 일인자 시리즈 이전에 이미 시놉시스가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라는 기사를 읽고 쓴 문장인데 출처는 잘 기억나지 않네요. 나중에 나온 책이 먼저 출간된 책보다 먼저 초고가 잡혀 있다는 내용이 신기하였던 터라 기억하고 있던 내용인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두번째는 명백한 실수네요. 은퇴후 자연사한 다른 루푸스를 거기에 집어 넣었네요. 지적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그 루푸스는 술라와 함께 집정관 임기를 시작한 사람 아닌가요? 함께 로마에 진군한 그는 스트라보의 병사들에게 죽지 않았나요?

  2. 트로이의 노래 구상이 로마 시리즈보다 먼저란 건 첨 알았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맞아요.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는 술라의 동료 집정관이었고 뒤에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병사들 손에 죽죠. 술라가 맡기로 한 미트라다테스 전쟁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주려고 했다가 로마로 진군한 술라 손에 죽는 루푸스는 그러고 보니 푸블리우스 술피치우스 루푸스였습니다.

    1. 맥컬로우는 소설을 두 번 씩 쓰는 버릇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로마의 일인자 시리즈를 제외하면 대개의 경우가 그랬고, 따라서 출판일과 초고 사이에 시간차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나중에 맥컬로우의 전기가 나오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요.

      근래의 한가한 틈을 타서 찬찬히 찾아봤더니 노바에 주둔 중인 군단을 인수하러 갔다가 죽는 인물은 어느 역사서에도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더군요. 그냥 술라의 군단병들에게 돌로 맞아죽는 군사호민관 혹은 대대장으로 나오더라구요.

      로마진군 시에 빌라에서 잡혀 죽은 전직호민관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가 맞구요. 번역된 책들 대부분이 술피키우스의 코그 노멘이 루푸스라는 사실을 제대로 기재하지 않아서 술라의 군단병들에게 죽은 호민관 루푸스와 술피키우스의 쿠데타 시도 당시 죽은 술라의 사위 루푸스, 스트라보의 손에 죽은 술라의 사돈이자 집정관 루푸스를 제대로 표기하지 않은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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