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그림자의 책

『바람과 그림자의 책』은 미국식 공항소설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만하다. 셰익스피어의 사라진 원고라는 미국식 공항소설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소재를 도입하고 있음에도 표준을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데다가 등장인물의 성격 변화, 인물 간의 갈등에 평범한 공항소설보다 더 많은 관심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소설은 공항소설답게 독자를 번거롭게 만들지 않는다. 무언가 새로운 배경과 사건, 인물의 캐릭터를 머릿속에서 상상하느라 열중할 필요가 없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방대한 헐리우드 영화의 주인공들과 장면들을 이용해서 자체적으로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할 수 있을 만큼 전형적이며 간결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유대인 마피아 아버지와 SS장교의 딸을 어머니로 둔, 아내만큼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험을 멈출 수 없는 전직 역도선수 출신의 지적권 전문변호사, 아일랜드계 경찰과 도서관 사서 사이에서 태어나 퀸즈를 배경으로 자라난 영화감독을 꿈꾸는 젊은이, 수수께끼 같지만 실제로는 이기적일 뿐인 묘령의 여인, 변호사의 절친한 친구이자 오쟁이진 남편이 된 셰익스피어 전문가 교수. 뉴욕에 자리잡은 러시아 마피아 두목. 살인과 납치, 협박과 총격전. 뉴욕과 런던, 밴버리와 취리히를 오가는 넓은 무대. 사실, 이 정도면 공항소설로서는 종합선물세트에 가깝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공항소설 이상의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한계 만큼은 어쩔 수 없다. unbearable lightness라는 표현이 딱 맞은 문체는 작가의 풍부하다 못해 복잡할 정도인 경험에도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장애물이다. 그의 서술에는 설명과 서사가 존재하되 그것이 강조하는 바는 단지 상황일 뿐이다. 상황과 처지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몰입을 제외하면 그 어떤 장면도 독자의 시선을 만족스럽게 끌어당기고 있지는 못하다.

가장 문학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는 하지만 문학과는 거리가 먼 영화 같은 이야기. 뛰어난 상상력, 평범을 웃도는 구성, 약간의 정서적 만족은 있되 아름다움은 한 톨도 가지지 못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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