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손톱

Tooth and nail이란 제목만으로는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확언하기 어렵다. 이안 랜킨의 Rebus 시리즈의 한 권인 『the Tooth and nail』같기도 하고 작년에 개봉한 영화인 <Tooth and nail>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뜻밖에 랜킨을 무시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부커의 단골손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빌 벨린저의 『이와 손톱(The tooth and the nail)』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실 벨린저에 대한 평가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범죄소설의 새로운 기원을 연 병렬 구성의 대가이자, 법정 스릴러의 대가이며 서스펜스의 명인이라고 하는 반면, 그보다 많은 이들은 굳이 기억해 두지 않아도 될만한 작가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벨린저는 소설 그 자체로 유명하기보다는 결말 부분을 제본하지 않은 채 출간한 과시적인 행동으로 더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런 내 판단은 소설을 끝까지 읽은 지금 한층 더 강해졌다.

사실 이 소설의 미덕은 결말의 봉인을 열지 않은 상태라면 언제든지 환불을 해주겠다는 겸손함과 마술의 새로운 정의뿐이다. 굳이 결말 따위는 보지 않아도 법정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의 심리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루의 이야기, 이 두 개의 병렬적인 이야기의 접선을 인식하는 순간 수수께끼가 손쉽게 풀린다. 이 정도 트릭을 참신하다고 생각한다면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의 세계는 항상 태양이 솟아 올라 빛나기 시작하는 여명일 것이 분명하다. 결국, 결말을 보지 않는다면 환불을 해주겠다는 제안은 겸손함일 때에만 빛을 발한다. 그것이 충격적인 반전이라든지, 혹은 예상 외의 결말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한 자만일 때 이 소설은 저질 마케팅 기법으로 지닌 바 한계를 감춘 하나의 사기극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드러난 객관적 사실 이면에 숨겨진 실체적 진실을 감추는 환상으로서의 마술에 대한 정의는 꽤 훌륭했다. 범작을 살짝 웃돌긴 하지만 결코 걸작이 될 수 없는 다소 평범한 소설임에도 무도한 범죄의 결과 범인에 얻게 된 것은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삶의 굴레이자 헛되이 도는 쳇바퀴에 불과했다는 묘사는 다른 단점으로부터 잠시 눈을 돌리게 할 정도로 참신한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 thoughts on “이와 손톱”

  1. 아아. 사이트가 무척 고급스러워졌어요. 위아래로 나와 있는 독특하지만 아름다운 글씨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요정어인가요? 아니라면 죄송… 전 지금 <이와 손톱> 주문한 상태예요. 외서와 같이 주문해서 오려면 일주일은 기다려야 하는데, 그 사이에 찬익님이 리뷰를 올려버리셨군요. 잘 읽었습니다. <시체는 누구?>는 아직 구입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읽어보려고 벼르는 중이랍니다. 전 옛날 추리소설들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더라고요. 아무리 범인 맞추기가 쉬울지라도… 전체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건지.

    그런데 폰트가 무척 예쁘네요. 이건 블로그 외향 바꾸면서 함께 딸려온 건가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1. 누이에 의해 수정 작업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원래 이 스킨이 hobbit이란 이름을 가진 것을 고려해 볼 때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그 요정어가 맞을 거예요. 사실 5년 전쯤 이 문양이 새겨진 반지를 커플링으로 끼고 다니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기에 확신을 갖고 있기도 하고요.

      솔직히 <이와 손톱>은 기대값을 조금만 낮추었다면 한결 재미나게 읽었을 것 같아요. 소설을 읽으면서 하게 된 생각은 똑같이 마술사가 등장하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프레스티지>의 트릭보다 못하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그러니 가능하면 사건의 핵심(The Heart of the Matter)을 모른 척하고 작가의 의도에 따라 느릿느릿 병렬 전개를 따라다가 봉인된 데뉴망를 읽으며 그럼 그렇지하고 살짝 비웃어주는 태도가 필요할 것 같아요.

      반면 <시체는 누구?>의 경우 놀랄만큼 고전탐정소설의 ABC를 잘 갖춘 것 같아요.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와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크리스티의 포와르/ 미스 마플 시리즈와 잇는 가교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거든요. 무엇보다 추리소설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사실성(앨러리 퀸 시리즈의 사실성과는 조금 다르지만요) 덕분에 두 전쟁의 사이 런던의 거리를 블랙캡을 잡아타고 뛰어다니는 느낌을 받게 되요.

      게다가 가장 오래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로드 피터란 주인공은 이튼 스쿨에 발리올 칼리지를 졸업한 고서 수집가로써 ‘오래’란 단어하고 거의 모든 방향으로 연결됨에도 불구하고 소일삼아 탐정 노릇을 하는 것 자체가 좀 역설적이기도 하고요.

      다만 11권이나 되는 시리즈가 전부 번역이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라 좀 걱정되기는 해요. 출간 예정을 확인해 보지는 못했으나 다음권 내용이 시리즈의 첫 이야기보다 휠씬 재미있어 보이는데 말이예요.

      참, 폰트는 우리글 닷컴의 우리새봄이란 웹폰트예요. 봄을 맞아 제 맥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폰트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냥 바꾸어 보고 싶더라구요.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