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라이터 (the Ghost)

토니 블레어의 커리커쳐는 환하다 못해 고약하게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웃음을 특징 삼아 그려진다. 존 메이저의 고루한 표정과 대비되는 이 웃음은 한때 블레어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기도 했다. 게다가 블레어의 젊고 매력적이며 배우처럼 잘 생긴 외모는 새로운 영국과 제3의 길로 상징되는 그의 정치적 행보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블레어는 90년대 노동당의 노선을 중도좌파로 옮기면서 보수당의 지배를 끝낸 극적인 승리의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PMship의 후반부는 테러와의 전쟁으로 점철되었고 그가 이룩한 업적에도 오늘날 그는 피로한 인상으로 퇴진을 종용받은 채 서서히 권력 기반을 잃어갔던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토니 블레어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여는 까닭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영국의 전임 수상 애덤스 랭이 바로 토니 블레어를 모델로 그려진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퇴임 이후 어느 투자은행의 사외이사로 영입되었다든지, 미국이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을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부시 행정부의 충실한 추종자 역할을 자임한 것은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유사성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토니 블레어와 닮은꼴의 인물인 애덤스 랭을 통해 로버트 해리스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가디언에 실린 로버트 해리스와의 인터뷰는 작가의 의도를 읽는 가장 좋은 참고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다. 기실 그가 주목한 부분은 대필작가와 의뢰인 사이의 관계였다. 의뢰인조차 제대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어떤 사실을 이끌어내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옮기는 사람. 진실을 끌어내는 것을 임무로 삼지만 결코 진짜배기 진실에 다가설 수 없는 한계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직업. 사람들이 읽고자 하는 거짓을 진실에 가깝게 보이도록 포장하는 전문가. 비록 토니 블레어가 부시 행정부의 대외 정책에서 미국조차 알지 못하는 진실을 옹호했던 부시의 가장 훌륭한 대필작가라는 조소가 덧붙긴 했지만
기실 그가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진실의 문제였다. (이 소설은 블레어의 퇴임에 맞추어 발빠르게 출간되었다. 따라서 독자는 블레어에 대한 폴스태프식 캐리커쳐와 스릴러의 플롯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소설에서 대필작가인 주인공은 전범재판소에 기소될 위기에 처할 전임 수상의 자서전을 대필해주기로 하면서 음모에 휩쓸리게 된다. 하지만, 그가 진실이라 믿었던 것은, 그가 추적한 진실은 실상 그가 보고 싶었던 진실이 그려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고, 읽고 싶어하는 진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결코 확연하게 다르지는 않은 거짓에 가까운 진실이 이 소설에서 다루는 문제의 핵심이다. 진실의 문제를 제외하면 친미적인 성향의 랭의 정책, CIA판 옥스퍼드 링은 사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기법상의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은 토니 블레어에 대한 문학적 초상이자 문학적 초상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모욕의 향연이다. 소설 속의 전임 수상 애덤스 랭을 전범으로 만들어 버리는 소설에서만 가능한 복수는 그가 신문지상을 통해 수없이 비난했던 블레어의 전쟁 지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조소다. 게다가 누구나 셰리 블레어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편보다 더 똑똑한 여자’인 루스 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대필작가와 벌어지는 전임 수상의 아내와의 정사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사악한 정치적 조크인 것은 분명하다.

얼마 전 로버트 해리스는 한 기고문에서 토니 블레어를 ‘짙은 안개가 낀 구불구불한 길에서 지도 없이도 버스를 몰 수 있는 운전사’로 묘사했다. 오늘날 영국이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현실은 기실 고든 브라운의 문제가 아니라 그 길로 버스를 몰아넣은 블레어의 잘못인 동시에 후임을 생각하지 않고 블레어에 대한 염증으로 그를 축출한 사람들의 잘못이라는 점이다. 아무도 블레어의 복귀를 바라지는 않지만, 블레어만큼 능숙한 운전사는 없었다는 사실을 로버트 해리스는 부정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는 비운에 암살당하는 여편네에게 끌려다니는 오쟁이진 남편이자 덜떨어진 연극배우 같은 정치가로 묘사하고 있긴 해도 말이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진실의 문제는 대필작가와 의뢰인, 독자로 이루어지는 꼭짓점 사이의 진실만이 아니다. 소설의 배경으로 묘사된 21세기의 현실은 소설이 그려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을 독자 앞에 내던진다. 블룸즈버리에서 걸어오던 주인공이 토트넘 코트 부근에 테러 때문에 유스턴을 돌아 메릴리본을 거쳐 패팅턴에 이르렀다가 그의 집인 노팅힐로 접어들었다는 간략한 단락은 실제로 피가 튀는 폭력보다 더 진지한 불편함을 독자에게 호소한다. 이슬람 도축업자들과 모스크가 보이는 지역에 사는 주인공에게 테러는 단순한 폭력일 뿐만 아니라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등장한 빅브라더스의 현실판이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해 금속탐지기를 거쳐야 하는 세상은 폭력의 위협 앞에 질식해 버린 감옥 속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구두를 벗고 허리띠를 풀어야 하는 세상에서 이런 블랙 유머야말로 이 소설이 지닌 진짜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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