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ality of Evil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 누구에게나 요즘은 ‘빛이 오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한 번 더 이토록 캄캄한 어둠 속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후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란 인용문이 딱 알맞은 상황이다. 그가 어떤 정치적 입장이든 간에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짙은 안개 속에 놓여 있다. 무엇이 옳고, 잘못되었는지 설명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어느 설명을 들어도 속이 개운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 난제 앞에서 모두가 어두운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다.

사실 요즘의 상황을 통해 깨닫게 되는 사실은 한국사회가 정말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라는 사실이다. 그토록 다양한 입장과 생각이 수면 아래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다. 그리고 누구나 정의와 정당함을 주장하지만 그 이면에 담긴 것은 적당한 순도의 진실과 자기기만 혹은 자가당착에 불과한 불순물이다. 다르게 비유하자면 요즘의 문제는 19세기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나 다를 바가 없다.

폴 존슨은 모던 타임즈에서 양차 세계 대전 사이의 프랑스 사회를 분석하면서 다양한정치적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사회라고 평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논의가 불가능했던 이유를 각자가 다른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같은 단어를 놓고도, 같은 사실을 보고도 서로 다른 사유체계 안에서는 그 의미가 달랐기에 원활히 소통할 수 없는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나 같았다. 개개인이 지닌 태도는 신념을 결정하고 그 신념은 사유체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사유체계는 정치적 의사결정에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도구다. 문제가 수면으로 부상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모른 척할 수 있었던 이 사실을 더는 모른 척 넘어갈 수 없다. 요즘을 통해 우리는 각자가 지니고 있었으나 의식하지 못했던 정치적 태도를 각성했고 나와 같은 태도를 지닌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다른 편으로  편 가름을 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은 누구든 그가 감내할 수 없다고 믿는 야만적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고, 이웃과 친구의 낯선 표정과 마주하고 있다. 또 애써 외면했던 불편한 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 전투가 벌어지는 내전 상황은 아니지만 우리가 입은 상처는 내전이나 다름 없으며 이 상처는 영원히 치유할 수 없다. 우리가 적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과거 한나 아렌트가 표현했던 ‘banality of evil’ 밖에 없다.

결국, 소소한 결론은 이렇다. 일단 다양한 정치적 인종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앞으로 서로 다른 정치적 인종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적용되는 기준은 정치적 공정성(political correctness)에 따른다. political racism에 해당할 수 있는 발언은 삼간다. 설득하거나, 설득당하거나, 설명하거나, 논쟁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멋진 상대주의인가? 또, 이 얼마나 고결한 evil of banality인가? 우리 모두 이제는 ‘웃는 남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이 세상은 또 얼마나 우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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