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책

가끔 나는 세상에는 수많은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공포에 대한 면역체계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경험을 쌓아가면서 공포에 대응하는 방식 역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는 제법 유명한 기차사고를 경험한 어머니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이 덧없이 짧다는 사실과 죽음에 이른 육체가 지니는 허망함이 내 마음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 내게 있어 이런 경험과 배움은 공포에 대응하는 나만의 방식을 결정짓는 요건이었다. 내가 열다섯 무렵 목매달아 자살한 이의 주검을 목격한 이후 그런 죽음을 경멸하게 된 것처럼, 의지를 상실한 육체가 지니는 추함에 진저리를 치게 된 것처럼, 부서진 손가락 끝 마디에서 흘러나오는 내 피를 바라보면서 피 흘림이라는 말에 무감각해진 것처럼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하지만, 오늘날은 살아가는 우리에게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확립된 공포란 개념은 한낱 사치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 각자가 느끼는 공포에 대한 정의를 잊어버린 채 미디어가 주입한 공포를 소비하고, 여기에 전율한다. 사실 공포란 매우 개인적인 감정이다. 때로 우리는 집단 공포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매스 프로덕트가 가져다주는 천편일률적인 공포에 제작자의 의도대로 반응하기란 여의치 않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낸 공포에 그들의 의도대로 전율하지만 이 전율은 어딘가 엇박자가 난 밴드의 연주처럼 때로는 너무 밋밋하고 때로는 너무 과하다. 개인의 삶과 경험이 만들어낸 총화로서의 공포를 이해하는 방식을 몇몇 개인의 상상력으로 충족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몇몇 개인의 상상력은 잔혹함을 강조하거나, 초자연적인 존재의 불합리한 폭력에 빙점을 찍는 것으로 공포를 과장한다. 대신 낯섦이란 인류가 원시사회의 일원이었을 때부터 지녀온 공포의 원천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기 짝이 없다. 과연 매스 프로덕트가 만들어내고 해석한 천편일률적인 공포가 아니라 개개인이 지닌 공포에 관한 해석에 기반을 둔 공포를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물론 여기에도 몇 가지 예외는 있다. 대개 이런 예외들은 저급한 호러 문화와는 구분되는 보기 드문 이정표로 기능 한다. 그다지 잔인하지 않은 <프라이트너>가 무엇보다 잔혹하고, 무서운 영화로 꼽히는 것처럼 몇 가지 예외작들은 공포에 반응하는 우리의 양식을 탐구하고 한계를 개척한다.

클라이브 바커의 『피의 책』은 이십 년이란 세월이 지녔음에도 이런 예외작이 되기에 충분하다. 『피의 책』에서 바커는 공포의 한계를 새롭게 정의한다. 통상의 상상력을 벗어난 낯설음이란 공포의 원천을 이보다 더 몽환적이고 기이하게 표현하기란 여의치 않다. 그의 공포는 통상의 잔혹함을 넘어선 공포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경지에 인접해 있다. 피와 찢긴 육체로 얼룩진 시각에 의존하는 묘사 따위는 촉각과 후각을 망라한 그의 공감각적 묘사의 탁월함 앞에서 기세를 잃는다.

게다가 『피의 책』은 대부분의 매스 프로덕트 생산자들이 간과한 공포와 매혹의 관계에 주목한다. 사실 공포란 동전의 한 면에 불과하다. 동전의 다른 면에 새겨진 것은 바로 매혹이란 얼굴이다. 공포와 매혹이 제대로 결합하였을 때에만 공포의 소비자들은 공포에 전율하면서도 여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공포가 아름다울 수 있는 때는 오직 무서움과 잔혹함이 헤어날 수 없는 수렁과 같은 매혹과 잘 결합하여 있을 때 뿐이다. 그리고 피의 책은 이런 공포와 매혹의 결합을 그 어떤 시도보다 더 능숙하고 꼼꼼하게 책장 구석구석에서 실현하고 있다.

2 thoughts on “피의 책”

  1. 최고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색다른 호러이야기였다. 9편의 단편을 모은 <피의 책>은 살육과 인육, 피 칠갑은 기본인데다 잔혹함의 농도도 짙은 책이다. 무서웠다. 잔인해서 무서웠던 게 아니?

  2. 피의 책 – 클라이브 바커 지음, 정탄 옮김/끌림예전에 클라이브 바커의 <피의 책> 영문판 서문을 부분적으로 인용한 적이 있다. 그 후 몇 년에 걸쳐 단편을 한 편씩 한 편씩 야금야금 섭취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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