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나기(2008)

사나흘에 걸쳐 여남은 개씩 쌓이는 국적불명의 <걸린글>들을 지우는 일은 귀찮기보다 되려 반갑다. 몇 년 동안 한켠에 놓아만 두었던 글과 덧글을 살피며 이제는 아릿해진 추억의 한 조각을 잠시 음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수수께끼 같고, 때로는 술주정 같은 언행들을 읽으며 몇 분쯤 행복에 취해보는 건 나쁘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암호문 같은 모호한 표현들의 진의를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문제가 기다리고있긴 해도 말이다. 어쩌면 그때의 풋풋하기만 했던 그 설익은 절실함을 다신 꿈꿀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토록 반가운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돌이켜보면 순박하다 못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지금보다는 그 시절의 내가 더 멋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진솔한 감정을 가졌고, 관대한 품성을 지니고자 노력했던 청년 대신 내 안에 자리잡은 것은 회의와 불신에 찬 음모가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는 지금의 난 꿈을 가졌던 맑은 표정의 그와 마주치기 두렵다.


정채봉의 『느낌표를 찾아서』를 좋아하던 소년은 새로운 필기구를 살 때마다 친구에게, 혹은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이에게 편지를 쓰곤 했는데 지금의 난 그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펜을 쓰지만 정작 그 펜으로 쓰는 문장은 단조롭기 짝이 없다. 아니 더 이상 편지를 쓸 곳이 없다. 서늘한 표정의 피곤하기만 한 친구들에게 다정다감한 편지를 쓰는 일은 어쩐지 손해를 보는 것 같아 내키지 않고, 몇 자 적어보았자 몸이 멀어진 만큼 감정의 진폭과 주기조차 달라져 진부한 인사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음, 흠모하는 이는 말할 것도 없고.


P.S.


다가오는 생일에는 윤후명의 『둔황의 사랑』를 갖고 싶다 졸라봐야겠다. 그의 아름다운 문장을 다시 읽고 있노라면 단단해진 껍질이 스무 살 소년처럼 말랑말랑해질지도 모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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