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 (the Box)

레베르떼가 쓴 『항해지도』의 주인공 코이는 떠들썩한 부두로 상징되는 낭만적인 항해시대와 컨테이너선으로 대표되는 현대적 항해시대의 접경에 있는 인물이다.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모험심 많은 선원들의 시대가 저물고, 전자 항법 장치에 의존해 항구와 항구 사이를 기계처럼 오가는 항해만 남은 시대. 코이는 결국 항해학교를 졸업하며 장만한 크로노미터를 아쉬움 속에 처분하고 만다. 항해 경험이라고는 고작 호수에서 오리 보트나 타봤을 근사한 블랙 수트 차림의 남자들이 순전히 멋으로 크로노미터를 왼팔에 올려놓는 이 시대에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실 이런 서두는 컨테이너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는가를 주제로 쓴 책에는 그리 어울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블랙웰즈에서 처음 이 책을 발견하기 전까지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컨테이너선에 대한 심상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탈리아와 아일랜드 이민자로 대표되는 부두노동자들의 뉴욕 이야기도 한 몫 단단히 했지만 말이다.

마크 로빈슨이 그려낸 모습은 권양기와 근육의 힘을 이용해 이루어지는 느린 운송이 컨테이너를 활용한 해륙연계운송을 통해 세계 경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보여준다. 저자는 규격화된 알루미늄 혹은 강철 박스들이 육상 트레이너를 위시한 운송시스템과 연결되면서 상품이 얼마나 빠르고 규칙적으로 세계를 여행하게 되었는지를 시랜드의 모체가 된 맥린사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저자는 하나하나의 기술 혹은 장비는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것들을 통합해낸 맥린의 비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은 조금은 달랐을지 모른다고 조심스레 주장하고 있다.

사실 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컨테이너 없는 세상을 그리리란 쉽지 않다. 하지만, 12미터짜리 상자가 어떤 위대한 발명보다도 큰 영향을 우리에게 미쳤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일은 드물다. 12미터 상자 덕분에 우리나라는 국제무역의 세계에 편입되어 경제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그 영향력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일주일간의 트레이너 파업만으로도 국제수지의 성적표를 새로 쓸 수 있으며 이는 채권 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목격했다.)

언제인가 이제는 고작 하루 한 번 밖에 기차가 운행되지 않는 낡은 역사에 앉아 공터에 가득 쌓인 컨테이너들을 보며 이들이 다녔을 여행을 상상해 본이 있다. 철판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낡은 고철 상자들이 담았던 상품과 희망들을 생각하며 기차를 기다리고 있자니 까닭 없이 고작 3~4TEU의 화물을 위해 거친 바다와 싸우다 망자가 된 선원들과 과거의 명성을 잃어버린 부두가 만들어내는 음산한 적막감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마크 로빈슨이 묘사한 컨테이너 혁명이 만들어낸 효율적인 세계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이익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코이같은 선원들이, 말론 브랜도가 연기한 부두노동자들의 고된 삶이 여전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 채 자리 잡고 있음을 부정하기란 더욱 어렵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