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누이들이 이 시집에 열광했을 때 솔직히 난 저 시집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문구가 궁상스럽고 못나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의 난 아주 가끔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되뇌게 된다. 지금 알고 있는 냉혹한 진실을 알았더라면 내 삶을 더욱 사랑하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사랑하며 보냈던 시간을 나를 위해 쓰지 않았을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요즘의 난 과거의 태만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천금과도 바꾸지 않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치르는 대가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쓰고 불쾌하며, 음습한 뒷골목의 좌판에 놓여 주인을 기다리는 방물처럼 처량하다. 참을 수 없는 비겁함에 나를 내던지는 거리낌도 사라졌고, 모욕에도 익숙해졌다. 자부심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나로서는 이제 더 빼앗길 것이 남지 않은 셈이다. 메마른 기계처럼 대답을 뱉어내는 내 입술은 어느 때보다 능변이지만 그 결론은 왜 이리 허무한 것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드디어 지난 화요일에는 모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것과 부딪쳤다. 그날 아침, 삐뚜름하게 안경을 쓰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 남자는 ‘줄만 서면 붙는 시험’에 떨어진 나를 비웃었다. 꽤 알려진 경제신문사의 보스가 던진 한 마디는 몇 년 전 그 남자가 내게 보여준 겸손하고 사려 깊은 행동과 맞물려 나를 혼돈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박봉을 감내하더라고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일에 대한 내 순진함을 저주하며 조용히 마주 웃어주었다.

어린 시절이나 예전이나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왜 난 잠시 잊었던가? 삶에는 잔인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패자의 뒷모습이 아름다울 때는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모습일 때뿐이라는 사실을 어째서 잊었던 것일까? 평범함이라는 피할 수 없는 굴레가 내 삶을 조이기 시작하는 이 즈음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탈출을 꿈꾼다. 삶이 이 창과 같다면 새로 고침이란 단추를 누름으로써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지 상상하는 내가 혐오스럽긴 해도.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은 나의 얼굴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후회하지 않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었던 최고의 찬사였다. 하지만, 요즘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난 스물여덟의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되리라 단 한 순간도 상상하지 않았건만 지금 내가 쓰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백서다.

여기저기서 받은 면접비로 제법 비싼 만년필 한 자루를 샀다. 책 없는 삶은 죽음과 같다는 라틴어 문구를 각인시키며 한순간 의기양양해졌지만 이내 몸과 마음 모두 가라앉아 버렸다. 이 펜으로 무언가를 쓰기 위한 기다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P.S.

결국, 고용통계에서 포지티브항이 되는 데 성공했다. 오래전부터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학창시절 한 번도 내 첫 직장이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연수를 받기 시작했다. 주변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지만 요약하자면 의외의 선택 혹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 대세다. 하지만, 수상한 시절에 오랜 고민 끝에 내린 내 결론이 틀릴 것 같지는 않다.

2 thoughts on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1. 익아, 누나가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네 블로그에 와서보니 글이 있구나. 아무래도 다시 여유의 시대로 회귀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무지하게 축하하면서 계속 쭉 밥벌이를 하면서도 오래오래 긁적거리는 너의 삶이 되도록 무한한 축복을 내리마. 참고로 이 누난 일년에 3편정도 블로그 글 올리는 중이다. 너 이리 되지말아라.그럼 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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