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천국

세상에는 각각의 빛을 품은 수많은 장소가 있다. 런던에는 런던의 빛이 있고, 파리에는 파리의 빛이, 프로방스에는 프로방스의 빛이 있으며 베니스에는 베니스만의 빛이 있다. 언제인가 여행 전문지의 사진기자가 되고 싶다고 되뇌었던 것은 이런 사실을 텍스트가 아닌 몸을 통해 느꼈기 때문이리라. 필름에 담기는 빛은 그동안 내가 여행했던 장소가 지니는 독특한 지문이 된다. 그렇기에 빛과 색을 고르라면 역시 난 색이 아닌 빛을 고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색이 빛보다 아름다울지라도. 빛은 내 삶의 희망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12월의 파리의 빛이 가장 아름답게 담기는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연석 위에 깃든 오후의 태양을 즐길 수 있는 퐁피두센터 앞 광장과 시가지 위에 낮게 걸린 구름에 닿은 파리의 빛을 볼 수 있는 퐁피두센터의 레스토랑에서일 것이다. 퐁피두센터에서 바라보는 파리는 매우 아름다워 센터에서 만날 수 있는 현대미술의 거장들을 초라하게 만든다. 예술이 위대할지 모르나 그것이 자연보다 위대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인 동시에 예술의 지향점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센터를 채운 수많은 재기 발랄한 작품들과 학생들의 스케치가 바라보는 궁극의 지향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저 빛이 만들어낸 위대한 풍광보다 더 멋진 것을 만들어 내는 것. 그런 꿈을 꿔보는 것이 어쩌면 퐁피두센터의 존재가치인지도 모른다.

사실 <화가들의 천국>이란 주제로 열린 퐁피두센터 특별전을 보고 이런 상상의 나래라던지, 감정을 토설하는 것은  온당한 태도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 인상에 남은 퐁피두센터를 말하지 않고서는 전시회를 보고 내가 느낀 정서적 이질감을 제대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내가 퐁피두에서 감상한 그림들은 보다 해체적이었고, 성기고 낯설었으며, 꾸미지 않는 오브제와 이미 현실에서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오브제를 구상과 비구상 모두에서 볼 수 있는 모순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퐁피두센터 특별전이란 이름과 다르게 전시회를 통해 내가 바라본 것은 오르세 미술관의 따스함과 테이트 모던의 온건함, 그리고 야수파이기를 포기한 화가들의 후기작들이 총망라된 예쁘고 이해하기 쉬운 성찬이었다. 12월의 빛을 즐겼던 그 당시로써는 이해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독특함을 대신한 것은 밝고 희망적인(?) 색채의 미술이었지만 내심 그런 부분이 더 좋았다. 진짜 ‘화가들의 천국’ 보다는 ‘갤러리의 천국’에 걸린 그림들이 더 아름다우리라 믿는 나로서는 ‘갤러리의 천국’에 걸릴 법한 작품들을 바라보는 동안 즐거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티즈의 위대한 실험정신과 브라크의 지문을 숨길 수 없는 초기작들, 언제나 보는 이를 매료시키는 샤갈의 무지개, 야수파의 해체를 선언한 이후 매너리즘의 함정에 빠져 다시는 위대함을 회복하지 못한 많은 화가의 그림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익숙하면서도 우아한 소품처럼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일견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자연스레 화가로서 완숙해지는 과정을 유추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 시대에는 더는 위대한 도전이 될 수 없겠지만, 당시로써는 위대한 도전이고, 실험이었음이 분명한 작품들과의 만남은 만남 자체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폴 존슨에 의하면 많은 작품을 보는 것보다 거장의 명작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것이 예술의 본질에 접근하는 더 좋은 방법이라지만, 사람은 굽이굽이 돌아가고  때로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을 더 좋아할 때가 있다. 내게 있어 이 전시회가 그랬다. 거장들의 걸작에 접근하는 수작보다는 그곳까지 도달하기 위해 모든 고뇌를 쏟아부은 수수한 작품들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2 thoughts on “화가들의 천국”

  1. 나도 여기 갔다왔지. 내가 원해서는 아니었고 어쩌다가 ㅋㅋㅋ
    뭐 나름 재밌었는데, 나는 저 티켓에 나온 휴가 그림이 너무 싫어. 저게 어떻게 희망적이지? 마치 이토준지 만화 주인공 같은 그림인데 말이야.
    가장 맘에드는건 그냥 타히티 바다 더군. 역시 난 바다매니아 ㅋㅋ 그외에는 다 별로였어 ㅋㅋ

    1. 너를 여기까지 데리고(끌고) 갈 정도면 정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네. 아니면 사탕발림의 달인이던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말 밖에는…(이것보고 얼마나 그 사람을 괴롭혔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온닫)

      사실 나도 이 그림 별로 였어. 희망적이라 보기에는 표정에 걸려있는 웃음이 웬지 허무한 표정이어서 말이야. 게다가 아직 내 이해의 수준은 1940년대 후반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든.

      그래도 마티즈는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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