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링턴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소설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의문을 표하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난 책이란 매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작가와의 대화를 즐긴다는 요지의 대답을 하곤 한다. 얼치기 독심술사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 순간 순간마다 이어 지지만 작가가 창조해낸 미지의 세계로 걸어들어가 작가의 생각을 훔쳐보는 일은 즐겁다. 거기에 독자라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서는 창작의 고뇌 혹은 재창조의 어려움에 대한 배려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독자란 작가가 창조해낸 무기물인 이야기에 상상력을 결부시켜 진짜 생명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때로는 비정할 정도로 냉혹해져도, 사소한 일에 흥분해도, 엉뚱한 이해로 작가를 오도해도 좋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소한 일에 흥분하기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는 역제 떄문에 소설이 지닌 매력이 반감된 경우에 속한다. 원제 the Arlington Park가 지닌 소설적 배경의 단순 명쾌함과 유사성은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라는 사족 덕분에 반감되고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아이러니가 담긴 제목 덕분에 소설 집중을 어렵게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실존이 되지만 ‘여자들의 완벽한 하루’는 ‘전설의 레젠드’ 따위에 불과한 넝마에 불과할 뿐이다. 열흘 동안 이어지는 비처럼 우울한 현실에는 그만한 진지함이 필요하다. 도시의 어느 거리로도 치환될 수 있는 평범함과 그 평범한 속에 담긴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참으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답답한 그 현실을 ‘어느 완벽한 하루’ 따위로 말장난으로 오도하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냉혹해지기

깊은 고민 없이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소설들의 특징은 참신함은 있지만, 신념이나 철학의 부재가 눈에 띈다는 점이다. 레이첼 커크스의 이 소설도 이런 특징이 두드러진다. 2/3지점까지 등장하는 각 인물들의 삶은 독자에게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하여, 여성으로서의 삶으로 규정되는 현실의 답답함에 대하여 분개하고 진지한 고민을 요구로 한다.

하지만 이런 인물들은 그저 그런 공간에 아무런 희망도 의지도 없이 놓여 있다. 레이첼 커크스에게 이들이 동정의 대상인지, 아니면 진지한 성찰의 대상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녀의 캐릭터들에 대한 작가 스스로 애정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겠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갇혀 천천히 삶의 무게에 질식해 버릴 때까지 하렴 없이 내일에 몸을 맡길 그녀들에게 목간 인형처럼 뻣뻣한 결말 대신에 약간의 다정한 배려를 베풀어 주었다면 이 작품은 조금 더 희망적인 작품이 되었을 테고 소설로서의 완성도 또한 높아졌을 것이다.

때로는 비극보다 희극이 삶을 더 잘 변주해 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웃음기조차 지워버린 채 또 다시 지옥보다 더 괴로운 현실에 울어야 할 독자들에게 그 누구보다도

P.S. Mrs. Dalloway를 추모하며, 버지니아 울프 흉내는 아무나 내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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