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y! Sweet dreams!

몇 해전 제프리 유제니다스의 『처녀들 자살하다』를 읽는 동안 과거를 추적하는 이제는 중년을 향해가는 미시간의 옛 소년들의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진 때가 있다. 그들의 후회와 안타까움 밑바탕에 깔려 있는 불행한 소녀들에 대한 미안함을 보면서 문학적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냈지만 동시에 결코 소년들 같은 후회가 내 삶에 찾아오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항상 잔인하다.

서른의 끝에서 옛 친구의 죽음과 조우했다. 너무나 안타까웠고 불행하였던 사건은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가해한 우울함을 선물했고, 결국 한 해를 마지막하는 12월의 마지막 오후 사무실 책상 앞에서 지구 반대편 아마존 강가에서 연말을 맞이한 친구와 학창 시절의 우리를 떠올리는 동안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귀국하면 밥이나 먹자란 그의 인사말이 허망한 마지막 인사가 될 줄 몰랐기에 참담함을 감추지 못하는 친구를 보면서 삶이 조금은 허망해졌다. 사무실 밖은 연말인파로 들썩거리기 시작했지만 그후로 몇 시간 동안 사무실에서의 내 웃음은 슬픔을 감추기 위한 가식이었다.

돌이켜 보면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은 항상 선명한 컬러 사진 속의 열여덟 봄소풍 당시의 모습이다. 대학 졸업의 후의 모습을 보지 않은 것도, 제대 후 어설프게 기른 수염을 보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왼쪽 끝에서 홀로 팔십 센티미터쯤 떨어져 누군가의 어깨에 팔을 기댄 그처럼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열 네 살부터 스물 한 살까지 수 많은 장면이 머릿속에 담겨져 있지만 왜 이 사진만이 계시처럼 떠오르는지는 이제는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가 되었다.

1994년 처음 내가 본 그는 결코 호감이 가는 존재는 아니었다. 듣기 불편할 정도로 빠른 말과 독특한 억양. 정상과 사시의 경계에 선 눈동자, 먼지 낀 안경. 나쁜 성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한다 쳐주기에는 모자란 성적. 무엇보다 열의와 노력은 있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지성. 격렬하지만 쉽게 꺼지는 분노. 이 모든 요소는 어리기에 더욱 잔인할 수 밖에 없었던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소년들 사이에서 그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돋보이게 만듦과 동시에 그의 한계를 가늠하게 만드는 기준이 되었다.

어느 날 지저분한 그의 안경릅 벗겨 닦아주면서 처음으로 맨 눈을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안경을 벗은 맨 눈을 보는 순간 열 여섯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피로한 눈과 조우하게 되었다. 그 순간에야 그도 우리가 그를 보고 느끼고 있는 인상을 모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동시에 특이한 생각을 내뱉거나, 돌발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 사실을 부각하는 지금의 그 자신도 진지한 결의를 통하여 형성된 하나의 행동 양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무지한 쪽은 나였으며 그가 그만의 방식으로 삶과 진지하게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 머리속을 꿰뚫었다. 동시에 그 의 노력과 좌절이 온전하게 보답받지 못할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힘겹게 만드는 괴로운 삶이 전개될 것이며, 그가 달관이란 개념을 배울 때까지, 내가 여기 있다고 격렬하게 제 목소리를 내는 행동 양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를 표현할 때까지 그가 평온함을 얻지 못할 거란 확신 마음 속에 새겨졌다.

시간이 흐름 속에 그와 오랜 시간을 공유하게 되었지만 처음 받은 인상은 계속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그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법이 싫지는 않았다. 나중에는 되려 좋아졌다. 그의 논리적 비약이 억지로 들리지 않고, 그의 짧은 분노에도 익숙해졌다. 그가 잠시 고요히 쉴 때는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으며, 그의 거친 숨소리가 좋아졌다. 질풍노도의 시기는 지나가기 마련이고, 시간은 소년에게나 노년에게나 똑같이 좋은 친구다. 인생은 제법 길기에 시간이 그에게 현명함을 가르쳐 줄 것이고, 결국에는 삶의 평화와 행복이 그에게 찾아올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운명의 여신이란 참으로 변덕스러워서 내 확신이 거짓이 되고, 혹여 그의 노력이 정당한 보상을 받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보답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

열여덟 이후 우리는 가끔 그의 행동을 장난 삼아 놀려댔지만, 그의 노력과 고단한 삶을 길고 긴 인생의 한 단계 혹은 준비 과정, 가치 있는 삶의 경험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도전과 희망이 스스로를 구속하는 덫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소년에게 꿈은 필요한 법이고, 그 역시 꿈 꿀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은 자신이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란 간단한 진리에 수긍했다. 아직은 뭐든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무모함이 소년의 특권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틀렸다. 적어도 칠십쯤은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삶이 그에게 허락한 시간은 고작 삽십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삽십년 쯤은 태어나서 자라고 울며 괴로워하며 커다란 목표를 꿈꾸어도 된다는 논리에는 그 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성취 혹은 달관을 통한 행복이 기다리고 전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아무도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때 알았더라면 조금 더 따뜻하게 안아주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누었을 고민을, 우리는 그가 혼자 해결하도록 놓아 두었다. 가끔 힘들다는 투정을 들어주기는 해도 결코 너에게 남아 있는 시간을 가장 가치있게, 가장 행복하게 쓰라고 조언해주지는 못했다. 그의 노력과 피로함, 고통, 고뇌가 보답받기를 빌어주었지만 늘 가능성에 반신반의했던 우리였지만 그가 종국에는 작은 삶에 만족을 느끼며 행복할 것이란 사실 만큼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서른에 어이 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그는 내가 보아온 시간 동안 오늘보다는 내일을 생각하며, 자신보다는 덧없는 주변에 기대에 부응하고자, 스스로가 인식하는 냉정한 현실에 수긍하기 보다는 더 나은 미래와 커다란 꿈을 향해 자신을 맡겼다.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은 이제 우리가 꿈꿀 시간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경종임과 동시에 소년들이 단 한 순간도 인생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십대의 어느 봄. 도서관에서 카프가 전집을 읽으며 그는 고통 없는 빠른 죽음, 혹은 자살이 그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때 우리의 반응은 한편은 걱정에 한편은 성마름에 꽤나 거칠했는데 돌이켜 그 순간을 생각하면 울음이 생각을 멈춘다. 완벽하고, 아름다우며,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했음을 이제는 안다. 그의 고단했던 삶에 때로는 장난으로, 때로는 어리석음으로 무게를 더했기에 미안하고, 그의 노고를 제대로 인정하지 못했던 인정머리 없음에 부끄럽다. 따뜻한 선의로 삶의 피로와 커다란 성공에 대한 갈증을 나누지 못했음을. 아니 말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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