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라트비아인

 아직은 웃음도 마음도 지금보다 더 앳되던 청년 시절에는 하얀 종이를 보는 순간 문장이 쏟아 나오곤 했다. 그 시기에는 산책하는 동안 흘러가는 생각을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흡족하게 채워주던 서평이 완성되곤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내 삶의 다른 일들처럼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변명을 하자면 꺼리는 많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나를 찾는 전화벨 소리 사이로 진지한 생각이 빠져 나가서 그런 것이라 자조도 해보고, 옛날 달라진 빠르고 즉흥적인 세상 때문이라 투정도 부려본다. 하지만, 얄팍한 변명 사이로 선명하게 보이는 진짜 이유를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이유란 간단하다. 이제는 글을 쓰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고백하고 나니 이제야 서툰 문장으로 나마 서평을 쓸 용기가 생긴다. 이제 진짜 다시 시작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반장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소설이다. 추리 소설 경력을 이어 나가는 동안 ‘심농의 매그레 반장’이란 언급과 조우할 기회는 있었지만 내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영국식 추리 소설의 전통이랄 수 있는 어수룩한 경찰에 대한 불신 혹은 조롱에 나 역시 깊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셜록 홈즈나 미스 마플, 포와르가 경찰 반장이라면 얼마나 어색할 것인가? 항상 허둥거리고 잘못된 단서만 추적하는 경찰이 없다면 유머는 어디에서 찾으란 말인가?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범죄 소설에 필요한 휴머니티는 단연 멍청한 경찰이다. 게다가 뛰어난 지성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 대신 귀찮은 일도 도 맡아야하고, 비웃음의 대상으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반장 시리즈는 이런 영국식 추리 소설의 전통과 배치 된다. 주인공인 매그레는 용감한 거인이면서, 지적이며, 무엇보다 감수성이 풍부하다. 게다가 그는 아편도 피워야 하고, 클럽에도 가야하는 바쁜 파트타임 탐정들과 다르게 사건의 일선을 떠나지 않는다. 메그레는 수사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인물이자, 다양한 정보 수단을 통제하는 인물이며, 사건의 단서들을 충실하게 독자에게 보고하는 인물이다. 매그레 시리즈에는  파트 타임 탐정들이 자신들의 천재성으로 줍게 되는 완전 범죄를 꿈꾸는 범인들이 놓친 단서 대신에 매그레와 함께 수사를 진행해 가는 동안 획득한 작은 단서들이 그려내는 큰 그림이 있다. 영국식 추리 소설에 비하면 트릭이 떨어지긴 해도 말이다.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매그레 반장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첫 작품이지만 꽤 충격적인 소설이고 아름다운 문체를 지닌 작품이다. 플롯 자체는 매우 간결하다. 열 페이지도 넘기기전에 독자는 사건의 얼개를 그릴 수 있다. 하지만, 매그레 반장과 함께 뒤쫓는 사건은 일반 추리 소설과 궤를 달리한다. 실제로 파리의 거리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보통이고, 탐정과 조력자의 안전이 보장되는 다른 소설과 다르게 반장이 아끼는 부하는 무참하게 살해 당하며 매그레 본인은 거리에서 총격을 받는다. 심농의 간결한 문체는 비스케이만의 차가운 바닷물과 빗물. 안개와 더러운 하인숙, 독한 술냄새를 자유자재로 그려내며 독자를 몽환의 세계를 이끈다.

 어쩌면 일반적인 좋은 추리 소설의 기준에서『수상한 라트비아인』은 좋은 평가를 받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추리 소설의 본분인 추리라는 얼개가 뛰어난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물들이 지니는 개성과 심리 묘사, 분위기 만큼은 탁월하다. 때로는 사건 그 자체보다 등장 인물이 지닌 삶의 비극적인 요소가 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슬픈 결말을 향해 처연하게 걸어가는 인물들의 뒷모습을 함께 바라보기에는 강인하면서도 예민한 매그레 반장은 좋은 친구다. 매그레와 함께 걷는 길이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그가 있기에 위안이 된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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