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November 2013

1.
11월의 어느 추운 밤. 아내는 기절하듯 잠들었고, 난 오랜만에 음악을 듣고 있다. 아니 날마다 FM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지만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음악을 듣는 밤이다. 피레스가 연주하는 슈베르트 소나타는 브람스보다 더욱 이런 밤에 어울린다. 아니 이런 밤에는 오이스트라흐의 프랑크 바이얼린 소나타도 피레스의 섬세하면서도 박력있는 연주를 넘보지 못하리라. 진한 커피를 마시며, 초콜릿을 입에 물고 있자니 이제야 피곤이 조금은 사라지는 기분이다.

해마다 어김 없이 찾아오는 11월의 병이 올해도 또 찾아왔다. 11월의 병은 꿈속에서도 일을 하는 증세로 시작한다. 평소에는 내 삶과 회사를 그렇게도 잘 구분하는 녀석이 11월만 되면 경계가 흐릿해진다. 마음쓰지 않아도 될 일들을 신경쓰고, 마음을 써야 하는 일들에는 무신경해진다. 어서 11월이 끝나고 평화로운 12월이 오기를 바라지만 시간은 늘 그렇듯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2.
일년에 한 권씩만 읽겠다는 매그레에 대한 내 다짐은 아내가 매그레에 매료되면서 위협을 받고 있다. 난 이제 고작 네 권을 읽었을 뿐인데 아내는 무서운 속도로 전집을 넘기고 있다. 나에게도 책을 사랑하던 영혼이 있던 옛날이 있었음을 마음은 기억하는데 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 어느새 내 기억의 궁전은 약탈 당한 듯 빈곤해졌고, 단단하게 짜져 있던 서가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난 스스로가 회색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끝없이 되뇌이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기의 내 기억의 궁전만큼은 화사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공허한 빌딩에 갇힌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요즘은 그 시절의 회색 인간 타령이 얼마나 유치한 투정이었는지를 깨닫게 만들어주는 참회의 시간이다. 진짜 회색 사무실에서의 삶을 보상해주는 아내와의 행복한 시간이 없다면 지루한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날마다 새롭게 쓰이는 인간의 졸렬함의 한계를 목격하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늘어나는 잔고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에…

3.
신기한 것은 이렇게 꺼져가고 있는 마음이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나오는 한 시퀸스를 떠올리고는 즐거워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에딘버러 기차역 부근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기념물에서 엇갈리는 두 남자를 담고 있는 장면에 이어, 비에 젖은 스코틀랜드의 날씨가, 그런 날씨를 보상해주는 아름다운 정원이,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시가지가, 저 멀리 북해가 보이는 에딘버러 성이 떠오른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스물 여섯 10월의 에딘버러 여행을 시간 순서대로 기억해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여행과 함께 비바람과 풀냄새도, 구두에 괴롭힘을 당하는 포석이 울어대는 낮은 으릉거림까지도. 스물 여섯의 2박 3일을 복원해낼 수 있다면 폐허가 된 내 서가도, 기억의 궁전도 다시 세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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