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

아내는 리히테르를 좋아한다. 아내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나도 리히테르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바이올린 콘체르토보다 피아노 독주를 듣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과장을 섞자면 리히테르라는 걸출한 연주가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 삶이 조금은 더 풍요로워졌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때때로 찾아오는 극심한 스트레스의 순간 동안 리히테르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와 그리그로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던지…

Screen Shot 2015-01-17 at 오전 12.00.32 사실 이 책을 사게 된 계기는 ‘명연주명음반’에 소개된 하나의 에피소드 때문이다. 리히테르가 철의 장막을 벗어나 처음으로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공연하게 되었는데, 연주에 앞서 리히테르는 독소전쟁의 시작과 함께 독일로 떠나버린 어머니를 이십여 년 만에 만났다고 한다. 상봉의 기대감 때문인지 다른 연주에 비해 미스 터치가 유난히 많지만 그럼에도 귀를 붙잡는 매력적인 연주가 1960년대 미국 청중들을 얼마나 매료시켰는지 흥분하여 떠드는 정만섭 씨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갑작스레 이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삶이 궁금해졌다.

왜 그는 망명 하지 않았을까? 아직도 미공개 음원이 발굴되는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독일계 러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은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베토벤의 삼중 협주곡을 녹음하기 위해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대가 네 사람이 한 자리를 모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가끔 꿈처럼 내 연배보다 열 살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의 서울 공연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최고의 연주는 무엇일까? 그는 바흐와 베토벤, 쇼팽, 슈만 아니 그 수많은 레퍼토리 가운데 무엇을 가장 즐겼을까?

원래 이 책은 브뤼노 몽생종이 ‘애니그마’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 중에 입수한 리히테르의 인터뷰와 그의 일기. 수십 년 동안 공연한 프로그램을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구성적 측면에서는 조금 특이하기도 하다. 하지만 리히테르의 연주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품었던 수많은 의문 가운데 일부에 대한 대답을 분명히 얻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전설이라는 수식어마저 빛이 바래는 대가가 바라보는 음악과 세상을 잠시나마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울 테니 말이다.

덧붙이자면 이 책은 2005년 초에 출간되었으며, 지난주 내게 온 책은 십 년이라는 세월에도 1판 1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작년에 방송한 종편 드라마에 중요한 장치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럼에도 1쇄라는 숫자는 다소 의외다. 하지만 편집이나, 번역 모두 빼어나고고 보존 상태도 완벽하다. 더욱이 리히테르가 여행 중에 보았던 수많은 공연에 관한 촌철살인 같은 평가는 위트와 시니컬이 잘 조화된 유명 작가의 페이스북을 읽는 것처럼 재미나다. 끝으로 미안하지만, 언제쯤 아내에게 이 책을 건네게 될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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