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아웃, 올클리어

젊은 시절 나는 책 없는 삶은 죽음과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책과 함께 하는 삶 대신 아내와 딸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책과 함께 하는 삶은 과거의 편린으로 남았다. 심지어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텅 빈 종이를 가득 채울 수 있었던 문장은 이제는 개조식에 길들어져 궁핍해졌다. 삼십 대의 나는 이십 대보다 더 많은 책을 읽을 줄 알았는데 실제 내가 읽은 분량은 부끄러운 수준이고, 나를 드러낸다고 혹은 내가 좋아한다고 믿었던 삶의 소품의 상당수는 이제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세월이 야속하게도 사십 대가 되었다

서평을 쓰기 전에 내 삶을 늘어놓았던 이유는 지금 이야기하려는 이 두 권 책이 내 삼십 대를 설명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첫 만남은 서른 살 초여름이었다. 회사에서 억지로 보낸 재미 없는 의무 교육을 듣는 동안 코니 윌리스의 신작 『블랙아웃』이 애플 북스토어에 올라온 것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후로 몇 년간 몇백 페이지를 읽고 다시 몇 달 동안 방치했다가 다시 처음부터 읽기를 반복했다. 내 인내심은 매번 호드빈 남매의 말썽에 무너졌다. 그 와중에 후속작인 『올클리어』가  출간 되었고 코니 윌리스의 주요 작품들이 때로는 신간으로 때로는 개정판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내 나이는 어느새 삼십 대 후반이 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코니 윌리스를 알리는 것에 성공했고 어느 순간 아내의 독서는 나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아내의 응원에 도움을 받아 나도 드디어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다.

코니 윌리스가 창조해낸 옥스퍼드 시간 여행자 시리즈의 사람들은 시공연속체인 ‘네트’를 통해 과거에 접근할 수 있다. 제2차세계대전을 관찰하기 위해 ‘네트’를 통과한 젊은 세 명의 역사학자들은 어느 순간 ‘네트’가 봉쇄되어 본인들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재로 돌아갈 수 없는 외통수 상황에서 이들은 독일군의 야간 폭격으로 신음하는 런던에서 제2차세계대전의 하루하루를 경험하게 된다. 백화점 점원으로, 폭격을 회피해 교외로 이동한 아이들을 돌보는 하녀로, 덩케르크에서 부상당한 종군기자로 하루를 보내는 이들은 혹 실수로 역사를 바꾸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영원히 이 시간대에 갇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압박감 속에 일상을 보낸다. 운이 나쁘다면 폭격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암전 속에서…

그러나 이 책은 비극이 아니다. 결과 때문이 아니라 코니 윌리스라는 작가 자체가 비극도 희극으로, 가벼운 소품으로 만들 수 있는 재주를 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삶은 지난할지라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으며, 폭격과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일상은 지속한다. 더욱이 이 책은 경탄할 만한 솜씨로 시간 여행이라는 소설적 장치를 통해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다. 시간 여행이 가능한 세계에서는 시간 여행자의 여정에 따라 미래가 과거일 수도, 과거가 미래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더욱더 아련해지고 이야기의 색채는 진해진다.

언제부터 시작된 버릇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출장길 비행기 속에서는 이륙과 동시에 전자책 한켠의 『올클리어』를  열게 된다. 짧다면 몇 시간, 길다면 열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옥스퍼드 시간 여행자 시리즈에 푹 빠져 폴리와 고드프리 경의 마지막 대화를, ‘the day of VE’에 펼쳐지는 비니와 아이린의 말다툼을, 무엇보다 트라팔가 광장의 마지막 장면을 반복해서 읽고는 한다. 답답한 비행기 안이지만 내 마음은 자유롭게 세인트 폴 대성당과 화재감시원을, 성 매리 병원과 구급차 대원을, 마블 아치에 부는 바람을,  기쁨으로 가득 차 트라팔가 광장의 사자상에 뛰어오른 알프와 비니를, 마지막으로 함께 고난의 세월을 견뎠으며 앞으로 고난의 시간을 보낼 친구의 반짝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멀리서 인사를 건네는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을 떠올린다. 세상에는 이 책보다 더 완성도 깊은 문학성을 가진 소설도 많고, 이보다 더 훌륭한 플롯을 가진 소설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내 삶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인생의 책은 이 책이라고 자신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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